제4차 창작콘테스트 시 공모, 우주궤도 外 4편

by 김기범 posted Apr 09, 201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우주궤도

 

    

어머니는 백만 광년을 헤아려도

닿지 않는 곳에 있다

아침마다 가족들의 얼굴을 빚어내는 명왕성,

빨간날은 우주의 유일한 휴일이다

행성과 소행성은 별자리에 바둑을 두고

명왕성은 부엌을 떠도는 중이다

거실의 궤도를 이탈해 식탁위로

저녁식사를 쏘아 올린다

쉬고 싶어도 발목을 붙잡는

사인용 식탁의 중력 때문일까?

명왕성은 혼수로 해온 TV앞에 앉아

이리저리 주파수를 맞춘다

먼 소행성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일일드라마의 블랙홀 속에 빠져든다

작고 왜소한 뒷모습을 본다

깊어진 주름살은 파인 홈처럼 돋아나있다

우주에서 소행성을 맴돌다 늙어버린 명왕성.

어질러진 우주의 구석구석,

먼지 같은 별들 쓸고 닦아낸다

태양계를 감싸려고 크게 궤도를 돌아왔던 곳,

차가워진 체온에 명왕성은 공전하지 않는다

더 이상 속옷에 붉은 꽃을 피우지 못하는,

태양계를 보듬다 떠난 명왕성은 어머니다.

 

전구

 

 

까맣게 우주가 스며든 단칸방,

전깃줄에 위태롭게 매달린 태양은

낮과 밤을 바꿔가며 깜빡이던 알전구였다

맞지 않는 일자리 억지로 소켓에 끼워 맞춘

아버지처럼 전구는 앙상한 유리 몸으로

어두운 집안 안에서 제 스스로 빛을 뿜었다

고열한 몸으로 집안을 비출 때마다

맞지 않는 소켓은 아버지를 쓰러트렸다

차가운 수술대에 오른 알전구는

몇 촉의 빚을 머금고 살았나,

옷핀 같은 메스가 가르고 지나갈 때마다

소켓이 있던 자리로 시린 바람이 불었다

몸에 꼭 맞는 새 소켓이 있으리라

소행성처럼 떠돌던 식구들을 품고

또다시 태양계의 축을 지탱할 아버지,

전구의 심장박동을 기록하던 심파측정기가

늘어진 필라멘트 위로 타오른다

아버지도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다.

 

흔적

 

 

어머니가 열 달 동안 나를 품는 동안

나는 하나의 섬이 되었다

 

비릿한 양수를 품은 섬 속에

임신선은 바다로 출항하는 수평선이 되었다

나는 갈매기의 울음소리처럼

부풀어 오르는 첫 울음을 터트렸다

뭍에 공룡 발자국 같은 몽고반점은

섬을 지켜나가는 그늘이 되었다

 

파도 끝의 포말이 오랜 시간동안

몽고반점을 지워냈다 스스로 섬을 지킬 수 있듯이

어두운 동굴에 박혀있던 암모나이트 화석은

주름 진 화석이 되어 나의 배꼽에서 흔들렸다

외딴 섬에는 흔적들이 섬을 지켰고

섬은 화석을 품으며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았다

 

작은 섬의 야윈 등대는

탯줄이 어머니와 나를 연결했듯

캄캄한 바다와 섬 사이의 통로가 되었다

또 한 번 배꼽이 떨려온다.

 

우렁각시

 

 

1.

빌딩 숲 곧게 뻗은 나무속엔

세월에 표백된 머리칼을

젖은 두건으로 단단하게 숨긴

우렁각시가 살고 있다

건물 안을 돌아다니는 발자국의 흔적 좇아

마포걸레의 점액질로 발자국 지워나간다

우렁이가 지나간 길목마다 남은 흔적들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

우렁이의 흔적이다

 

2.

아이들 웃음꽃이 만개한 학교

지린내가 자리 잡은 화장실에서

끝나지 않는 끝말잇기와 낙서들,

여기저기 흩뿌려진 오줌 자국 지우다 보면

코끝을 찌르던 지린내를

우렁이 등껍질이 머금었다

퀴퀴한 냄새 걸친 우렁이의 옷이

집안으로 유유히 기어가면 혹여 냄새를 들킬까

차가운 안방으로 몸을 숨기는 우렁이

 

3.

더러워진 흔적들을 갉아먹고 사는 우렁이

건물들의 틈에 달라붙어 누군가 모르게

지나간 자리로 하얀 그림자가 드리운다

등껍질처럼 단단하게 사는 법을 배우며

오늘도 젖은 바닥이 흥건한 자리로 유영한다.

 

냉장고의 불면증

 

 

불 꺼진 부엌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내의 증세는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어둠 속 짙게 깔린 고요함을 허물고

진물을 흘리며 뒤척이는 문짝들,

밤의 폐활량을 다잡으며 비닐 장판 위로

이젠 발자국을 찍었을 사각형의 계절

사내는 스스로 온도를 낮춰갈 때마다

성에 낀 잠꼬대를 하며 울어댔을지도 모른다

밑반찬들은 사각사각 사내의 내력을 엿듣고

소비자효율을 기억하는 새벽이 찾아오면

요란하게 뒤척였다 다시 잠잠해지는 반복을,

그것은 사내가 가진 마지막 심박동으로 들려왔다

사내의 몸속에서 쉰내가 짙어질수록

하얗던 피부는 어느새 점점 황달이 피어오르고

노년기 느슨해진 노인의 방광처럼

바닥에 물을 흘리던 사내는

잠 못 이루는 밤을 축축하게 건너야만 했다

달무리 지고 잠이 드는 사내

꿈속을 유영하는 가뿐한 숨소리가 울린다

불면증을 나누지 못하는 방 안 사람들이

하나 둘 집 밖을 나서면 홀로

부엌을 지키고 서있는다

늙은 사내의 체온이 서서히 식어가고

- 코드 뽑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Articles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