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숲 외 네 편

by 소미아 posted Apr 1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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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숲



오늘은 마스크를 쓰고 나왔어.

갑자기 테러리스트가 나타나면 큰일이니까.


나는 그대가 부러워.

그대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어.

그대는 전 세계를 여행해.

틈새를 타고 어디로든 갈 수 있지.


당신은 자유인가요?

순간 당신은 위험해진다.

돌연 묻지 마 범죄에 가담하여

손에 지니고 있던 염산을 뿌린다.


누가 당신의 머리를 금발로 염색했나요?

도망치며 돌아본다.

당신의 공격으로 시야가 뿌옇게 보여

당신이 보이지 않아.


건물과 건물 사이 거대한 숲에 갇혀

온 몸을 부딪쳐 가며 우는 그대여.

이 넓고 복잡한 세상 당신은 갈 곳 없어.











빛과 어둠 사이


1.

나는 이슬을 지키는 자
눈, 코, 입이 없어 그리운 자
어둠이 빛을 범하던 순간 태어난 자
밤과 빛이 몸을 섞는 시간은 위험하죠.
어제는 죽고 오늘은 태어나요.

- 그는 어둠으로 그린 그림일까요?


2.

이슬, 너는 
쓸데없는 호기심이 많아.
어둠이, 밝음은 
어떻게 새벽을 만드는지
보고 싶다 했지, 잠이 드는 순간처럼.

- 빛에 묻은 얼룩일까요.


3. 

어둠이 나를 삼켜요.
얼굴이 흙빛으로 질렸구나.
나는 빛과 어울리지 않는 존재래요.
빛을 흐리는 존재래요.
어둠이 그랬어요.

-빛에서 태어나 자꾸만 불안해하던 너는
어둠 속에선 어디에 숨었을까요?
 
 
4.
 
나는 빛에서 태어난 밤.
아름다운 것들은
제 흔적을 재빨리 지워버리더라.
행여나 흔해질까 서둘러 사라지더라.
몰래 흘린 눈물처럼.
 
- 안녕, 나를 지켜주던 밤의 그림자여










꼭 맞는 잔


슬픔, 슬프다, 슬프니, 슬퍼서…….
마음이 아프다, 괴롭다, 애통하다, 우울하다…….
잔을 비운다, 잔을 바꾼다.

자꾸 넘친다. 
고여서 웅덩이를 이룬다.
더 붓지 말라고 손을 피해 휘청거린다.

소주는 소주잔, 맥주는 맥주잔.
결국 슬픔은 슬픔에.

잔을 비울 때마다 혼곤해지는 단어.
눈물방울보다 작은 두 글자.
얌전하게 일기장 한 구석에 앉아있는.
하여 위선적인 그 글자.
슬픔의 젖가슴에 머리를 박고 부비고 싶다.

슬픔이라는 단어 속 슬픔의 의미 찾기.
슬픔을 해부하시오.
ㅅㅡㄹㅍㅡㅁ
팔딱팔딱 뛰는 개구리 건강한 심장
늘어놓아도 슬픔은 슬픔.
그게 아니라면?

잘린 슬픔은 뭉개진 마스카라. 
번진 아이라이너.
그것의 바닥에는 벗겨진 발뒤꿈치가 있다.
바닥부터 눈동자 표면까지 서로를 잡아당긴다.

슬픔.
단어가 몸을 떤다. 덜덜. 
일렁인다.
댐이 터지면 어쩌지?

나는 그만 그것을 엎어버리고 싶다.
장난처럼.
그러면 다 빠져나갈까. 그보다는,
몸 안에 농익은 마음이 가득 찬 날.
다른 잔으로 바꾸고 싶다.
알맞게 표면 장력을 만들어서
컵과 액체가 팽팽하게 대치할 때까지.










남은 자리


나는 어제 죽었다
온기는 어제처럼 멀어졌네.
살갗을 익히던 붉은 색은 바래지고

나는 몹시 추워 손 내밀었어
달은 점점 야위어가고 있더라.
나는 손을 좀 녹일 생각이었어.

달은 싸우고 다니다 멍이 들었더라.
나는 달 허리 깎아 먹으며 근근이 버텼지
뽀얀 속살에서 자꾸만 재가 떨어졌다

아마도 나는 내일 죽었는지 몰라
달에 손을 쬘수록 등이 시려와.
던져 놓은 속살들이 익어가고 있을 텐데

나는 한 줌의 재로 사위어가는 중.
달은 꾸역꾸역 재를 흩날리며 여전히,
아직도

달 타는 냄새가 그을음으로 번지는 밤이야
던져놓은 고구마를 찾고 있는 밤이야
반짝이는 도시에선 도통 찾기 힘든 맛이야










무궁화호 밤기차


팔짱을 낀 채 꾸벅거리는
승객들의 눈 감은 얼굴에도
그늘이 질 때

어둠은 때리며 다가오고
물 자국을 남기며 멀어져 간다.

둥글게 몸을 말고 
견디어온 섬은
그리워했다가
힘차게 덤볐다가 
서서히 잠식당한다. 

가시 돋친 친구의 음성이
떠밀려왔다가 부서지고
서글픈 아버지 얼굴이
넘실대다 열차에 부딪는다.

밀물 되어 밀려오고
썰물 되어 떠나간다.
한 번 파도칠 때마다
이물질을 남겨 
내장을 찌르며 부유한다.

귀로 밀려와
넘실대는 것들은
데려온 불순물들을
도로 가져가지 못하고
지나간다. 

버려진 파편들이
몸속에 쌓여 다 녹지 못해
건드리며 돌아다닌다.





박신화 / somia406@hanmail.net / 010-3056-5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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