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콘테스트_시공모_안미경

by 한달 posted Apr 1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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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거기엔 다 있을 텐데

없는 거 없이 다 있을 텐데

뒤주에 갇혀 문틈으로 보던 억울함일망정

막상 거기 도착해보면 아무 일도 아니었으리.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난다는 소금물 권력

사도세자만 억울했을까

소현세자도 할 말이 참 많았으리.

다 못한 그 많은 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고삐 풀린 말들이 가 닿은 곳

그 곳에 내 아버지도 정박했으리.

늦은 귀가

양복호주머니에서 땅콩 한 줌 내어주던

어떤 날은 오징어다리 두어 개쯤 쥐어주던

소박한 내 아버지도 정박했을 거기

야속하게도 남김없이 가져가 버린 그러나 남겨야 했을

아버지의 마지막 말도 거기엔 있을 텐데

 

고개가 아프도록 쳐다보고 있다.

 



먼 길

                                                      

사월 푸르른 날 오후

벚꽃잎은 흐드러지게 날리고

날리는 꽃잎 맞으며 검은 세월호

천천히 길을 나선다.

 

숨을 참아 잔뜩 부풀대로 부푼 배는

너무도 가벼이

소나무 깊은 골짜기를 지나고

너르디너른 몽골 초원을 건너고

건조한 열반에 든 고비 사막 위를 나른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바다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

슬프게 지워가는 얼굴들

속절없이 시간의 문턱을 넘는다.

 

물속으로 잠기는 기억들

미안해,

사랑해,

잊지 않을게,

물먹은 약속

그것은 차라리 붉은 진달래꽃이다.

봉오리째 툭툭 끊어지는 여린 것들.

 

맘에 걸리는 얼굴들

걸리지만 잡을 수 없는 이름들

너무 멀리 갔을까

물거품이 되어 날아갔을까

 

분노는 바다를 잠재우지 못하고

바다는 성이나 잠들 줄을 모르고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하고

멍든 가슴만 치고 있는

저 어미.

   

 

봄볕

 

막상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

느지막이 일어나 눈곱도 안 떼고

밥상머리 앉기가 미안해서

애꿎은 베란다에 나가 색깔 바랜

등나무 의자에 앉았다.

, 따뜻하다

봄볕

그러고 보니 열매 하나 못 맺는다고 구박했던

사랑초가 귀한 밥풀처럼 하얀 꽃들을 달고

무방비로 흐드러져 있다.

말갛고 앳된 얼굴들

 

파도처럼 거센 젊은 피를 대적하지 못하고

일터에서 밀려난지 한 달, 그리고 또 하루, 이틀......

 

패잔병처럼 쭈구리고 앉아

그 신선함에 머리를 조아린다.

, 열일곱 권좌에서 밀려난 슬프고도 어린 왕은

두견새를 탓했다지만

나이 먹을 대로 먹어 아무데도 갈 곳 없는 나는

이리 좋은 봄볕을 슬프게 탓해야만 하나

   


어느 봄날

 

혼자는 아무래도 뻘쭘하다.

한 날 한 시에 같이 죽자고 맹세한 호위무사들처럼

그렇게 개나리는 줄지어 울타리를 만들고

한 치의 틈도 없는 완벽한 경비.

아지랑이 뒤에 숨어서 얼굴을 가린 주군은

이미 기억에도 없는데

누구를 위한 수고로움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어깨를 단단히 걸고 있다.

소금장수 아들이 상장군이 되는 걸 보았지.”

소금장수 아들이 이번엔 왕이 되고 싶어 한다지.”

천민의 세상, 세상은 변하는 거야.”

썩을 대로 썩은 세상 엎어야 돼.”

오랜 숨죽인 기다림으로

발밑에 납작 엎드린

얼굴 시퍼런 쑥들이

곰부족의 짐승같던 마음을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제 족속의

더 오래된 풍문을 귀를 열고 듣고 있다.

 



닮은 길

 

할매가 가던 길

이삭 주우러 가던 그 옛날 논두렁 길

할매는 구부정한 허리에

뻣뻣한 세월을

포대기로 질끈 업고

다 늦은 점심나절 길을 나섰지.

포대기가 자꾸 흘러내리면

그제사 가던 길 멈추고

허리 한번 폈을 뿐인데

상여꾼들이 지나는 먼 산엔

구성진 노랫가락이 바람을 피우고

할매의 성긴 머리카락을

시끄럽게 헝클었지.

먼 산을 오래오래 바라보던 할매.

 

나 오늘 그 닮은 논두렁길 보았네.

 

 

 

안미경

san1804@naver.com

010-3168-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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