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아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꾸만 ‘나중에’라고 해
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데
눈 깜짝할 사이에 커버릴 거란 말이야
아무것도 끌어안지 않기엔 그들의 긴 팔이 너무 아까워
어린 아이가 느끼는 하루의 더딤은
오랜 기다림으로부터
시계를 볼 줄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소파에 누워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다려요
나는 착한 아이니까 가만히 누워 시계만 바라봐요
긴 바늘이 짧은 바늘을 또 따라 잡아
바늘들은 자기들끼리 술래잡길 계속해요
나랑 또 소풍가요 아침엔 도시락을 싸고
손에는 풍선을 쥐어주세요
내 기억 속 가장 행복할 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혼자만의 술래잡기가 되지 않도록
물고기
물고기에게 성대가 있었더라면
하다못해 벌레처럼 비벼서 소리를 낼 날개라도 있었더라면
고급 횟집 수족관
입모양으로만 뻐끔대다가
생을 마감하는 물고기들이 있다
그물로 물에서 건져 올려 질 때부터
도마 위에 올라 회칼로 손질 당할 때 까지
도마 위 필사적인 물고기의 몸부림은
머리를 얻어맞고 저항 없이 그친다
비명이라도 질렀으면
피라도 왈칵 났으면
모두가 이렇게 마음 편히 볼 순 없겠지
커다란 접시에 생생한 두 눈이 박혀있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온전한 물고기가 손님상에 오른다
감지 못하는 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뻔뻔한 사람들은 살점을 집어 먹는다
나는 물고기가 불쌍하다 말하려다
나도 소리 낼 수 없는 물고기인 걸 깨닫고
조용히 그들과 같이 젓가락을 들었다
별
밤하늘에 유난히 밝은 별이 두어 개
혼자서 낭만에 젖다가
“야, 그건 인공위성이야.”
못 들은 척 나는 마음속으로 별자리를 그린다.
안개
비는 소리도 없이 밤을 내린다
공간을 나누는 검은 산이 화선지를 그었다
색깔 없는 검은 촉이 안개에 가린 산을 그리고
푹 젖은 종이에 은은하게 먹물향이 났다
압도하는 산맥에 질린 산이 구름을 끌어당겼다
높은 산일수록 구름과 닿기는 쉬웠다
안개는 가리우는 것
또 덮어놓고 흐리는 것
안개가 내린 풍경은 흰 종이로 남았다
달에도 비가 올까
달의 바다에도 물고기가 살까
확인할 수 없는 질문이 허공을 맴돈다
색깔이 지나가는 역과 역 사이에서
안개꽃이 몰래 피었다 졌다.
떠오르다 만 기억 그 어쩌지 못할 진공의 상태
돌아서다 잊어먹어도 좋다
흰 종이로 남은 공간엔
하루를 기어가는 애벌레가
나무에 붙은 시간을 갉아먹겠지
웅크린 산짐승이 겨울을 나겠지
지도
여름밤
배가 볼록해지도록 수박을 먹고
팔뚝에 뚝뚝 흐르는 단물
채 닦지도 못하고 허겁지겁 잠이 든다
밖은 그치지 않는 비
빗방울을 삼킨 꿈이 재생된다
하늘을 날고 달리고 뜀뛰고
코끼리였다가 돌고래였다가
닻을 올려 항해를 시작하고
화가가 되고 의사가 되고
앞뒤 없이 황홀한 꿈
이불 한 장에 지도로 담아낸다
위도와 경도는 없지만
가장자리 경계선만은 확실한
지도는 꿈의 일기장
아침은 맑게 갠 햇살을 받으러 나오는 지도들
집집마다 마당에, 옥상에
이불이 걸리던 시절이 있었다
대문 앞 키를 쓰고 듬성한 이로 웃는 아이
이제는 커버린 내가
지도 한 장 그려내지 못하는 까닭은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아서일까
꿈이란 아득히 먼 곳이란 걸 깨달아서일까
어린 날 빨랫줄에서 굳어버린
꿈의 화석,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