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차 창작 콘테스트 시공모 (전예진)

by 찌니 posted Apr 1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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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아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꾸만 나중에라고 해

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데

눈 깜짝할 사이에 커버릴 거란 말이야

 

아무것도 끌어안지 않기엔 그들의 긴 팔이 너무 아까워

어린 아이가 느끼는 하루의 더딤은

오랜 기다림으로부터

 

시계를 볼 줄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소파에 누워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다려요

나는 착한 아이니까 가만히 누워 시계만 바라봐요

긴 바늘이 짧은 바늘을 또 따라 잡아

바늘들은 자기들끼리 술래잡길 계속해요

 

나랑 또 소풍가요 아침엔 도시락을 싸고

손에는 풍선을 쥐어주세요

내 기억 속 가장 행복할 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혼자만의 술래잡기가 되지 않도록




물고기

 

 

물고기에게 성대가 있었더라면

하다못해 벌레처럼 비벼서 소리를 낼 날개라도 있었더라면

 

고급 횟집 수족관

입모양으로만 뻐끔대다가

생을 마감하는 물고기들이 있다

 

그물로 물에서 건져 올려 질 때부터

도마 위에 올라 회칼로 손질 당할 때 까지

 

도마 위 필사적인 물고기의 몸부림은

머리를 얻어맞고 저항 없이 그친다

 

비명이라도 질렀으면

피라도 왈칵 났으면

모두가 이렇게 마음 편히 볼 순 없겠지

 

커다란 접시에 생생한 두 눈이 박혀있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온전한 물고기가 손님상에 오른다

 

감지 못하는 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뻔뻔한 사람들은 살점을 집어 먹는다

 

나는 물고기가 불쌍하다 말하려다

나도 소리 낼 수 없는 물고기인 걸 깨닫고

조용히 그들과 같이 젓가락을 들었다




    


 

밤하늘에 유난히 밝은 별이 두어 개

 

혼자서 낭만에 젖다가

 

, 그건 인공위성이야.”

 

못 들은 척 나는 마음속으로 별자리를 그린다.




안개

    

 

비는 소리도 없이 밤을 내린다

공간을 나누는 검은 산이 화선지를 그었다

색깔 없는 검은 촉이 안개에 가린 산을 그리고

푹 젖은 종이에 은은하게 먹물향이 났다

 

압도하는 산맥에 질린 산이 구름을 끌어당겼다

높은 산일수록 구름과 닿기는 쉬웠다

 

안개는 가리우는 것

또 덮어놓고 흐리는 것

안개가 내린 풍경은 흰 종이로 남았다

 

달에도 비가 올까

달의 바다에도 물고기가 살까

확인할 수 없는 질문이 허공을 맴돈다

 

색깔이 지나가는 역과 역 사이에서

안개꽃이 몰래 피었다 졌다.

떠오르다 만 기억 그 어쩌지 못할 진공의 상태

돌아서다 잊어먹어도 좋다

 

흰 종이로 남은 공간엔

하루를 기어가는 애벌레가

나무에 붙은 시간을 갉아먹겠지

웅크린 산짐승이 겨울을 나겠지




지도


 

여름밤

배가 볼록해지도록 수박을 먹고

팔뚝에 뚝뚝 흐르는 단물

채 닦지도 못하고 허겁지겁 잠이 든다

밖은 그치지 않는 비

 

빗방울을 삼킨 꿈이 재생된다

하늘을 날고 달리고 뜀뛰고

코끼리였다가 돌고래였다가

닻을 올려 항해를 시작하고

화가가 되고 의사가 되고

앞뒤 없이 황홀한 꿈

이불 한 장에 지도로 담아낸다

 

위도와 경도는 없지만

가장자리 경계선만은 확실한

지도는 꿈의 일기장

 

아침은 맑게 갠 햇살을 받으러 나오는 지도들

집집마다 마당에, 옥상에

이불이 걸리던 시절이 있었다

대문 앞 키를 쓰고 듬성한 이로 웃는 아이

 

이제는 커버린 내가

지도 한 장 그려내지 못하는 까닭은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아서일까

꿈이란 아득히 먼 곳이란 걸 깨달아서일까

 

어린 날 빨랫줄에서 굳어버린

꿈의 화석,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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