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차 창작콘테스트 시 부문 아쿠아리움 외 4편

by 훈이츄 posted Apr 0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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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아리움

 

밥 때를 놓친 주둥이가 생떼를 부렸다

듣다 못한 아랫님이 크게 일갈을 놨고

난데없이 눈알들이 굴러떨어져

황급히 줄행랑을 놓았다

 

횟집 밖에 비치된 수족관에 걸음이 멈칫

하나같이 떠 있는 눈깔들이 낯익다

푸른 봄이 꼭 그런 눈을 하고 있다지

 

누군가의 허기는 등푸른 살기

고깃집 문 앞을 돌아선 사내의 유별난 변덕에

등골에 박힌 지느러미가 매가리를 잃을 테고

슬퍼진 나는 눈물을 흘릴까 조문을 외울까

 

결국은 침

침처럼 고인 망상이 입가를 타고 흘러

흘러 파도처럼

 

뼈대만 남은 생선대가리가 먼저 지나가고

녀석의 버둥거림도 지나가고

친숙한 아가미가 내게도 있는데

물살에 거스를 수 없으니 탈 수 밖에

 

상어로 태어나지 그랬냐

송사리 같은 위로

굴하지 않는 파닥거림 그게 중요하지

 

잠잠해진 수면을 찰박거리며 문을 끼이익

귀가 퇴화된 생선들은 책 속으로 물질하고

왠지 나도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다시 첨벙

 

 

 

 

 

 

 

 

 

바람의 이름

 

콧잔등 위로 부는 바람에 미간을 찌푸렸더니

아직 새끼인 녀석이 틈새로 끼어버렸다

어미는 자식을 내놓으라고 더 세게 불고

나는 눈가가 시려 더 질끈 감는다

 

살집이 붙고 천장까지 거리가 줄었다

허나 자란 건 나만이 아니었음을

한 뼘 털뭉치 같던 주인 집 순돌이 짖는 소리도

그 딸내미 마주칠 때 으스대는 콧방귀도

건넛편 쬐그만 상가도 건장한 마천루로 자랐다

참 그 상가는 나이를 거꾸로 먹었네

 

그러다 알게 됐다 건물의 성장을

허리가 굽을수록 철근이 올라서고

코를 찡그려 바람을 쥐어짜면 튼튼해지더라

 

김씨 아저씨가 말했다 내게 바람이 보인다고

그러는 김씨 아저씨도 바람을 끼고 살았다

성질 급한 박씨 아저씨도

박사출신 이라는 최씨 아저씨도

이 사람들은 그걸 풍파라 칭하며

있는 힘껏 콧대를 으스러뜨린다

왠지 멋들어진 이름에 끄덕인다

 

덧칠 없는 피부 힘줄만 도드라진 인생에

풍파라는 근사한 단어가 스며든다

풍파...풍파...

입은 자꾸 곱씹어 언어를 부려보고

성실한 주인이 되어버려

신이 난 오함마질을 멈출 수 없고

그래서 더 찡그리고 질끈

 

 

 

 

 

 

 

 

묘연

 

담배 연기 끝자락이 궁금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것이었는데 이젠 아니다

가녀린 몸으로 아스르던 걸 기억한다

 

수직으로 비가 꽂히는 저녁을 수평으로 걷던 사내에게

사선으로 오르는 하얀 연기는 일종의 애정이었다

궤도를 벗어나 잠시 머물다 떠나간 날숨은

의사의 처방전도 가볍게 내팽개치고 토해냈으니

 

이름 짓지 못한 기체야 아무도 모르게 달아나렴

 

조마조마하게 지켜본 막내 연기가 어찌어찌

잿빛구름에 삼켜지고 나서야 횡격막이 또 크게 부푼다

비틀대는 걸음과 자욱한 넋두리

검은 봉다리에 소주병 맞닿는 소리 카랑이고

우산이 버거운 붉은 달이 선득하게 웃으면

곁에 다섯 살배기 꼬마 엄마 품에 달려든다

인상을 찌푸린 모녀

그래 그 냄새를 기억해라

구겨진 세상을 제대로 보려면 나도 뭐가 하나 구겨져야지

공자가 무언지 맹자가 무언지는 옛날로 덮어버리고

담뱃불처럼 타닥이다가 혐오스러운 꽁초로 사라지련다

사내의 주검엔 구린 호흡이 덕지덕지 묻어있더라도

그의 하얗던 호흡을 기억해주길

변명은 아기의 트림처럼 나올 랑 말 랑 하는데

등을 두드려 주는 이도 없이 혼자서는

불현듯 나타난 금연구역 표시에 숨이 멎는다

 

 

 

 

 

 

 

 

 

 

 

 

글루미 로드

 

죽어도 좋을 오늘을 살며 생명을 캐내는 광부들아

밤하늘에 깔린 사금 파편을 주우러 떠나보자

굽이굽이 휘어진 산맥 같은 척추를 넘으며

미지의 탄광에 신들린 괭이질을 하러

 

탁발승처럼 염불을 외워볼까

논다니처럼 웃음을 팔아볼까

일단은 영어로 된 노래를 불러보자

조금 굶주리면 어떤가 신이 나면 됐지

 

저기 3번 늑골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세월을 반찬으로 끼니를 때워보련다

고개를 들어 밑을 보지마라

바닥 밑엔 돌아올 수 없는 강이 흐를 뿐이야

 

동료의 죽음에 송연할 여유가 어딨냐

시커먼 고지가 눈앞인데

저 노랗게 살찐 둥근 것은 내 몫이다

뭣하다면 반을 떼줄게 눈초리를 거두어라

 

발자국이 많구나 선배들의 것인가

곡괭이를 아무리 뻗어도 못 미치고

오늘은 일요일이니 그만할까

강물이 허벅지를 적시네

 

죽지 못하고 생명을 까대는 광부들아

결국 별이란 건 허구와 다름없으니

영어로 된 노래를 불러보자

뜻을 모르면 어때 우울하면 됐지

 

 

 

 

 

 

 

 

 

 

겨울아침의 소녀

 

추운 날 아침 소녀가 있었다

시린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순백의 입김을 내뿜으며

회색 승합차를 기다렸다

책 속을 헤엄쳐야할 작은 손은

볼품없이 굳은살이 박혔다

 

사연 많은 삶을 위로해주기엔

해는 너무 객관적이었다

늘 그렇듯 제때에 떠오르고

돌아보지 않고 떠나간다

 

소녀는 벌벌 떤다

발아래 그림자도 함께 떤다

검은 테두리 안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더 어린 개구쟁이들은 껴안고 떤다

절벽에 피어난 가지 위로 쌓인 눈처럼

가지가 흔들리면 눈도 쏟아진다는 걸 아는지

소녀는 온 힘으로 떨림을 멈춘다

 

흔들리는 삶은 위태로운 것이구나

바람은 재미있단 듯 불어대고

 

매너리즘에 빠진 운전사는

시계처럼 소녀 앞에 멈춰 섰다

아직 잠이 덜 깬 차 안으로

존엄하기 그지없다는 생명이

발부터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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