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첫 눈
여름에도 가끔 차가운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나무에 숨어 지내며 귀를 때리도록 우는 매미마저
이 무더위에 조금은 쉴 수 있도록
겨울에는 가끔 뜨끈한 열대야가 왔으면 좋겠다.
밤새 눈싸움 하고 놀고픈 나의 아이가
털 많은 장갑 귀찮아하지 않도록
여름, 겨울이 지나 다시 돌아올 화사한 봄에는
작년 가을에 은행 떨어지는 사라진 그대가
여의도 공원 앞 4월의 벚꽃처럼 다시 피었으면 좋겠다.
무참히 밟혀 고약한 내음을 풍기는 널부러진 은행처럼
그대는 다시는 내게 오지 않을 수 있겠지만
후후~ 후후~
작은 가방에 떨어진 은행을 담아 줍는 그 재미처럼
그대를 다시 안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backspace
고3 수능이 백일 남았다고
신문과 뉴스와 엄마가 불같이 난리를 피울 땐
몰라보게 커 버린 내가
몰라보게 작아져 버린 교복을 다시 입고 싶을 땐
그대를 마음껏 사랑하다가
예정에 없던 권태기가 올 것 같을 땐
눈물 콧물 쏙 뺀 이별이 싫어
애처럼 사랑하던 그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을 땐
높은음자리표
휑하니 텅 빈 다섯줄 감옥에 하늘을 그렸다.
높은음자리표는 말 없이 내 손을 기다렸고
작은 연필이 허락도 없이 내 이야기를 적었다.
손가락만을 기다리던 멍청한 통기타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석고상을 지긋이 문질렀고,
어느새 젊고 젊은 입술이 내 노래를 불렀다.
하얀 눈물은 목적지를 잃은 채
뱅뱅 돌려 그린 높은음자리표처럼
노래에 취해 한없이 아래로 뜨겁게 흘렀다.
자작곡처럼
기척 없이 찾아온 선녀와 나무꾼의 사랑처럼
그렇게 너는 내게 한 사람이 되었다.
말해보고 싶었다.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아니 그냥 ‘예쁘다’ 만이라도.
점점 더 간절해지고 있었지만,
죄수를 묶은 수갑처럼
멀쩡한 입은 좀처럼 열리질 않았다.
내 마음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자근자근 조용히 편지를 썼다.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다가
휘파람 불 듯 조심스럽게 흥얼거렸다.
이리저리 뚝딱뚝딱 손을 보고
한 번 더 스윽, 닦아내고 보니
신기하게도, 묘하게도
그렇게 너는 내게
한 곡의 근사한 노래가 되었다.
청년주 靑年酒
내 청춘을 누가 막걸리
내 열정을 누가 막걸리
내 마음을 어찌 막걸리
내 인생을 어찌 막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