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어쩌면 처음부터 새겼을
맨 발로 맨 땅을 딛었던
낯설고 차디찬 시작을
이유 없이 설렘 없이 뛰어드니
적갈색 바람만이 나를 휘날려
누구도 없을 그 기로에서
종착지가 멀어지는 외로움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눈물 한 방울 가벼이 떨구며
뒤로 돌아볼지니
축복으로 두 볼을 쓰다듬던
배려 가득한 두 눈동자
첫 눈
올 것을 예감한 듯
올 것을 예감한 듯
이어지는 말문에
꿈인지 생시인지
만날 수 없는 지금의 너는
미래의 나에게
만날지도 모를 지금의 나는
미래의 너에게
미련한 서로를 쓸고 나니
금세 녹아버린 하얀 시간
삶의 진행
어제는 과거가 되고
생중계되던 목소리도 기록되어
마음은 저물고
몸둥아리만 살아남아
멈출 수 없는 삶의 진행에
목덜미가 잡혀 끌려가는데
그래도 젖지 않으려 끌어올린 밑단
미술관 앞 도로
뉘엿 저무는 해가 그을린 구름은
맥락 없는 춤사위를 감싸고
푸른 하늘에 새겼던 약속은
붉은 빗방울이 되어 떨어지는데
아우성치는 나뭇결 사이로
숨겨진 보석이 노랗게 반짝이고
신호를 무시한 채 뛰어든 팜플렛은
차에 치여 흩어지네
공중에 붕 뜬 나날들 사이로
마침표의 붓이 얼굴 위로 날아들 때
차가운 맨바닥에 한 움큼 깔린
일천 개의 자화상
꽃씨
그대의 품에서 맡은 향기는
내 방의 이불 속까지 파고들어
아침마다 열리는 웃음꽃에
햇살의 투사도 반겨줄 거야
나른하게 이겨낸 밥상도
발자국을 디디던 공원도
모두 그대를 향해 피었으니
꽃은 씨가 되어 나를 잠식하네
말은 씨가 되어 너를 잠복하지
이따금 찾아오면 간지럽혀 줄게
멈추지 말고 곱씹어 주길
어김없이 앉은 자리를 서성이길
한 아름 팔 벌려
두 아름 안겨다 줄테니
내 얼굴에 칠한 색채를
빛깔의 벌들에게 전하기를
이지선
010-4855-4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