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차 창작콘테스트 시 부문 응모작 <허공> 외 4편

by 린지 posted Nov 0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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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


초록을 다듬으며 숫자를 세고 있는 뒤뜰에서

태양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에 너의 향기가 느껴진다.

 

넌 안뜰에 살았는데

몇 발 디디지 못한 뒤뜰에서 네가 지나간다.

 

잎의 숫자를 세던 것이

너를 타고

너의 목축임의 숫자로 넘어간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만이

타는 듯 쥐고 있는 햇살이

단지 너의 바라봄이기만 하면 좋겠다.

 

허공에서 한줌 쥐면 그게 네가 되니

멀리 가 찾아 헤매던 그 시절보다 낫다 생각하고 말련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등 배김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습니다.

달라붙어 닿은 윗입술과 아랫입술의 접착을 느끼다

덮인 눈꺼풀의 곡선을 헤아립니다.

눈을 덮은 눈꺼풀의 굴곡이 떠오릅니다.

오늘도 감긴 어둠을 가만히 바라볼 뿐입니다.




안에서 피다.


설익은 꽃봉오리를 잡아 뜯어

빈 껍질 한가운데로 펼쳐 놓고

껍질과 이파리의 허공을 헤아립니다.


비어있는 것의 양분을 모르고

오므라들려는 봉우리를 자꾸만 해쳐 놓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씩 껍질에 닿아 숨결을 전하며

향기가 베어날 것을.




가을 쉼표


 벼의 노란 몸과 머리를 황금빛으로 만들어버린 눈뜰 수 없는 강한 햇빛에 눈꺼풀 끝자락에서 살짝 굽어 말아 올린 속눈썹과 햇살이 길게 내려 빗은 하얀 머리카락의 흩날림이 어우러져 굽이치는 반짝임과 번갈아 찾아왔고, 숲 속의 나무들이 서로 빗겨 서있듯 새들과 곤충들도 겹침 없이, 눈 비비며 기지개 피듯 작은 속삭임마저도 쉼표를 무시하지 않았다. 강렬함만 내세우고 채도싸움만 하던 나뭇잎들은 은은하게 한 발짝 물러섰고 소리 없던 싸움의 끝맺음으로 목청 높여 소리치던 곤충 대신 저 멀리 숲 속에서 울리는 듯 숲 속을 바라보고는 들을 수 없는, 언덕진 구불길 꼭대기에서 양 무릎을 가지런히 모아 붙이고 하늘을 바라본 채 귓속말로 전해오는 조근거림에만 집중해야 하는 - 아주 작은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10년 차이


베이지 빛 갈색의 좁고 길쭉한 직사각형 위로 몽글몽글한 둥근 유동체가 떠있었으며, 땅에 깊이 뿌리를 내려 뿌리조차 보이지 않아 회색 땅에 불안하게 흔들리는 나와는 다른 우직함이었고 깊이감 이었으며 그 갈색위로 올라가 유동체에 손을 뻗기만 하면, 굵은 나뭇가지가 자연스럽게 얇은 가지를 만들어내 큰 나무로 하나가 되어 성장해가듯 그 안정감이 내가 되고 회색 불안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이렇듯 우러러보며 추구하는 만큼 갈색상자는 내게 가까운 것이 아니었으며 감히 뿌리의 세월에 있었던 일조차 짐작할 수 없어 뒷모습만 가늠해볼 뿐이었다.




김다현

padden@naver.com

010-2391-3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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