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룽지 외 5편

by 할머니소녀 posted Dec 0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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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룽지

                     

내가 좋아서

일부러

전통 가마솥 속으로

생년월일 골라서

태어난 기억은 없다.

 

내가 솥 아래 부분에

깔리게 된 것은

순전히 주인아줌마의

재주 많은 손길로 인해

다른 쌀알들보다 먼저

뜨거운 별자리에

자리 잡게 되어서이다.

 

보통 사람들에 비해

딱히 자랑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밑바닥 신세를

원망해 본 적도 없다.

비굴한 각오로

자살하는 생각 같은 것은

꿈에도 해 본적 없고

묵묵히 동네 모퉁이에서

제자리 지키며

살았을 뿐인데

늙은 말년에 가서야

나라는 존재의

제 맛을 내게 되었다.

 

빡빡 긁힌 것도 모자라서

팔팔 끓는 물에

곤두박질 당한 후에야

견줄 바 없이

구수한 맛으로 나도

당당하게 세상에

나서게 되었다.

내 이름은 누룽지

아주 멋진 이름이다.



겨울 빨래하기


장마 비 사이로

하늘 열린 여름날에

세탁기로 팽팽 돌려낸 빨래를

건조기에 넣지 않고

짱짱한 햇볕에 말리곤 했었다.

뽀송뽀송하게 잘 마른

옷에 흠뻑 배인 복숭아 빛

해님의 향기 맡으며

윤회의 묶은 기억을 씻어낸

빨래를 새 옷 선물 받은

아이처럼 가슴 뿌듯하게

걷어내곤 했었다.

 

지금은 해가 너무 짧고 아예

해님 얼굴을 구경도

못하는 날이 많아서

옛날 솜이불처럼 무거워진

내 마음을 빨래하려니

한 여름 햇살처럼

힘차게 펼친 손으로

날아갈 듯 빨래를 너시던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빨래줄 뒤에서 맑은

시냇물처럼 반짝이던 엄마의

미소가 떠오른다.

오늘처럼 험상궂은 겨울날이면

빨래건조기도 없던 그

가난했던 시절에 재치 풍부했던

우리 엄마는 따스한

아랫목에 젖은 빨래를 말리셨다.

엄마 가슴 같은 아랫목으로 나를

밀어 앉히시던 꽁꽁 얼은 엄마의

그 손길이 그립다.

 



시를 춤추다


시를 쓰면 안 된다고

그냥 버틸 수 있다고

수없이 내 마음을 다독이곤 했다.

사치스런 감상쯤이야

흘려보낼 수 있다며

평생을 촘촘하게 바느질하는 자세로

나를 버리고 살아왔다.

 

하나씩 둘씩 그렇게 메꾸어 온

바둑판같이 줄그어진 세상살이가

반평생을 훌쩍 넘겨 버렸다.

 

이제와 새삼스레 시를 쓴다고

무슨 큰 대수라도 날 것처럼

망설임 없이 펜을 든 나의 눈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오만하던 바둑판의 선들은

사라지고 없다. 이제

하얀 백사장 같은

신비로움이 펼쳐졌다.

 

아무런 경계선도 없는

청 푸르게 넓은 들판이다.

이제부터 큰 숨 쉬어야겠다.

내 안에 잠겨 잊혀졌던

근원의 힘으로 어깨를 들썩이고

이성과 감성의 양팔 흔들며

시의 춤을 추어야겠다.

죽지 않은 나를 살려야겠다.

 


토요일 늦은 아침


황진이의 이불 속도 아닌데

산 사람의 온기가

포근하게 깊이 닿아오는

시간을 붙들고 들숨날숨

잠에서 서서히 빠져 나오는

그런 아침이다.

마냥 편안한 등뼈가

누워있는 내 침대 속이 좋다.

 

손을 뻗어 붙잡아야 할

그리운 이도 없고

밝아오는 이별의 시간을

두려워해야 할 일도 없다.

혼자서 잠에서 깨어나는

일이 찌뿌듯하지 않고

오색 색깔의 새 깃털처럼

가볍고 산뜻하다.

 

구태여 내가 외롭지 않다고

생각할 필요라도 있는가

내가 듣고 싶은

임의 목소리는

소리 내지 않는 노래 소리이다.

정성으로 사랑의 진동에

주파수를 맞추고

아름다운 산봉우리 바라보며

먹을 것 만들 수 있는

내 부엌에는

가을의 창문이 있다.

 

음식냄새 내는 일은

피할 길이 없어서

배고픈 영혼들이

하나 둘씩 모여든다.

늦은 아침식사를

마음으로 함께 한다.

전쟁터에서 엄마 잃은

아직 어린아이들이

발그스레한 사과얼굴로

굶주린 배를

채우는 모습이 보인다.

 

생명의 씨를

품어보지 못한 내 몸은

이제 쭈글쭈글한 사과껍질처럼

한 방울씩 말라갈 것이라며

내 얼굴을 다정하게

쓰다듬어 줄 사람 없어도

나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혼자서도 아주 잘

먹을 수 있노라고

이 늦은 토요일 아침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내일이면 곧 일요일인 것을.


























































언어의 힘


당신이 알고 있는

단어들을 머리 속에만

담아 두지는 마세요.

우리의 두뇌는 탁월하지만

아주 갑갑하고 탁탁

숨이 막히는 어두운

공장일 뿐 이예요.

 

지식의 파편들을

먼지 쌓인 벽돌처럼

구석에 밀어놓지 말아요.

말의 힘 때문에

당신 가슴 속에서

감흥이 물결치면

진리가 파도치는 영혼의

바다로 항해해요

 

천상의 소리를

모짜르뜨의 악보에

가둬놓고 연주하지 않는 것은

비극 중 비극이지요.

지식의 보석을 생각의

그늘에서 꺼내오세요.

 

희망의 단어가 당신

눈동자 속에서 반짝이고

사랑의 언어는

미소로 피어오르고

생명이라는 말은

솟아나는 걸음걸이로

살아내게 하세요.

 

당신이 알고 있는

지혜의 단어들을

어두운 잠에서 깨우세요.

언어의 날개를 널리 펼쳐서

신세계를 만들어요.



살아가는 틀


내가 나일 수밖에 없도록

이미 다 조건화되어진

존재라고 할지라도

나는 나일 수밖에 없다.

내가 만들어내는 생각의 색깔들이

이미 주어진 틀 속에서만

그 빛을 발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나의 생각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내 사념 속에서

나를 선택할 수 있다.

나의 미래가 내 안에 있고

나의 행복은 지금 여기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내가 나인만큼 그만큼

나만의 의식의 흐름을

멈출 수 없다.

 

나는 나를 온전하게 만들어내고

그런 나를 사랑할 수 있다.

나는 너로 인하여 존재할 수 있고

그러므로 나는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왕이면

어린아이들처럼 재미있는

놀이거리를 생각해내는 것이 좋다.

우리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함께 웃고

함께 고통 받을 수 있는

시공간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잠시 쓰다가 버려지는

온갖 인공물들을

법 제도와 사회시스템까지도

아주 심각한 표정을 짓고

정교하게 만들어낸다.

 

온전하지 않으면서도

웃음 웃을 수 있는 우리들은

이런 식으로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허상을 만들어내고

또 계속해서 망가뜨린다.

지구촌 이곳저곳에서 오래된

카르마를 깨뜨리는 소리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한다.

그래서 이왕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도록

그렇게 꿈꾸고

그렇게 깨어나는 것이 좋다.

 

 












 

 













시를 쓰면 안 된다고

그냥 버틸 수 있다고

수없이 내 마음을 다독이곤 했다.

사치스런 감상쯤이야

흘려보낼 수 있다며

평생을 촘촘하게 바느질하는 자세로

나를 버리고 살아왔다.

 

하나씩 둘씩 그렇게 메꾸어 온

바둑판같이 줄그어진 세상살이가

반평생을 훌쩍 넘겨 버렸다.

 

이제와 새삼스레 시를 쓴다고

무슨 큰 대수라도 날 것처럼

망설임 없이 펜을 든 나의 눈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오만하던 바둑판의 선들은

사라지고 없다. 이제

하얀 백사장 같은

신비로움이 펼쳐졌다.

 

아무런 경계선도 없는

청 푸르게 넓은 들판이다.

이제부터 큰 숨 쉬어야겠다.

내 안에 잠겨 잊혀졌던

근원의 힘으로 어깨를 들썩이고

이성과 감성의 양팔 흔들며

시의 춤을 추어야겠다.

죽지 않은 나를 살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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