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낙하 물 한 방울
잔잔하던 수면 위로 파문이 인다.
원으로 크게 이어지는 파동 따라
그 끝을 따라 보면 과연 유리벽.
가뜩이나 갑갑한 유리벽 시야를
뇌란 물 때가 가리고 있다.
수면 끄트머리를 간질이는 해초 한 다발
혹시 바다 냄새 나진 않을까
향을 북돋워 보지만
역시 플라스틱 냄새만 진동한다.
시야 낮춰 중앙을 보라.
뻐끔뻐끔 금붕어,
금방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개 팔자가 상 팔자는 머언 옛 말
고기대가리에 비린내 풀풀 내는,
그러면서 양심의 가책 하나 없는
붕어 팔자가 금(金) 팔자다.
밑으로는 흉물스런 수챗구멍
언젠간 호로록 소리 내며
몽땅 빨아댈 테지만
기약 없는 약속 따위
기대도 안 하는 눈치다.
수족관이 그야말로 가관이다.
로미오와 줄리엔
강물에 비가 흩뿌려진다.
비는 강물을 만나 반가운 이야기를 한다.
어디 다녀온지도 모른다.
물과 물만이 아는 비밀한 모임.
장미야
네 가시만 아니었더라면
한 움큼 잽싸게 쥐어잡아
그의 품에 안겼을텐데.
그 가시에 찔리지만 않을 수 있다면
한가득 하늘에 흩뿌렸을텐데.
로미오와 줄리엣
아니, 로미오와 줄리엔.
우리 사랑, 금지된 사랑이자
하나의 영원 불변 법칙.
태초부터 거역된 사랑,
극다수가 팽개치는 무용서의 사랑.
제아무리 잘난 이들이
뒤집고 헤쳐 놓으려 해도
수천년째 이룩되지 못하는 당위성의 이야기.
의자
의자가 쓰러졌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쓰러진 의자는 일어서지 않을 게다.
한여름 베란다에 찰싹 붙어있는
에어컨 실외기.
그 놈이 뿜는 바람마냥 힘없이 흩날린다.
알알이 닿아오는 따뜻함의 방울방울.
한 서린 여인네의 오뉴월 서리도 아니오,
시나브로 젖어 오르는 아침 이슬도 아니오.
몇 세기를 악물은 통곡 소리인지,
일월(日月)에 눌려 잃어버린 언어가 얼마였던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너를 잃으면
내 갈 곳을 상실해 버리기에
이대로 망부석이 되지 않을 테다.
부디 이제야 찾은 정적을 깨지 말아라.
의자를 세우지 말아라.
떠나겠어요
오늘 밤 난 떠나겠어요
볼 품 없는 이 꽃반지를 던지고 떠나겠어요
두고보세요
옛 회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잔인하게 떠나겠어요
하지만 길을 걷던 중,
당신의 이름 한 자라도 보게 되면
또다시 주저앉아
당신 향한 향수(鄕愁)의 눈물 흘리겠지요
언제나 내 마음 조이는
이 미칠 듯한 줄기는
도무지 날 풀어 놓으려 하지 않아요
여름 밤 하늘
떨어지는 별들 헤아리며
눈물 감추려 하겠지만
언제나 내 마음 조이는
이 미칠 듯한 줄기는
도무지 날 풀어 놓으려 하지 않아요
불량감자
옅은 황갈색 흙더미와
산비탈길 가운데 곧게 뻗어 있는 층계 한 다발.
아슬아슬하게 걸터 앉아 있는 내 모습.
혀 끝에 고추냉이가 닿아
입 안 가득 알싸함이 퍼진다.
턱에 아무리 집어 넣어도
줄줄 새는 내 모습.
밑 빠진 독에 시간을 붓는다.
무모한 과욕이 낳은 어설픈 사탕발림,
아무것도 모르고 기고만장한 낯짝이
내가 봐도 우습다.
나는 불량감자
싹이 틔고 못생겼다.
욕해도 좋다.
중요한 건,
싹이 틔었단 것 오직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