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차 창작콘테스트 시 부분 - 공상 외 4편

by ㅈㄴㄱ posted Feb 10, 201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햇빛이 시린 날>


햇빛이 시린 날이 있다.

잔인하게도

다시금 서린 물이 채워지는 날.


저 빛이 나의 색마저 모조리 뽑아갔는가.

흑백이 되어 걷는 나의 옆으로

에메랄드빛 추억들은 지나간다.


시계의 모래가 막힌 듯한.

까만 나무들이 다가가지 않았다면

시간조차 가늠치 못할 빛.


저 묘한 찬란 앞에 느끼는

무의 외로움.

가장 차분한 행복.


나는 말없이

이 작은 행성 대신 붉은 트랙 위를 공전하다

이내 정처 없이 빛에 이끌린다.


저 시린 빛을 껴안고 싶다는 욕구.

그러나 그는 금세 사그라들고

태엽 풀린 오르골만 멍하니 남는다.



<공상>


낡은 쪽배 누워

날개를 위로 접어들고 영겁을 노래하면

낙서처럼 마구 얽히는 영롱한 이파리 내음

그와 함께 별처럼 들이치는 역광을 음미하며

늪 속으로 사정없이 빠져든다.


고요한 질척임.

그만 멈춘 것은

나인가

아닌가

체온마저 그에 동화될 때쯤

늪은 모래바람처럼 흩날려 사라지고

어느새 억새풀만한 한자락 바람만이

남는다.



<대작>


굳게 가리었던

골방의 커튼을 확 제꼈다.

벽지를 온통 장악한

그들을 보고 까맣게 소름이 피어난다.

온몸의 역병이라도 닦아내듯

혐오의 손길로 박박 문지른다.

장렬히도 박아내린 뿌리가 멍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까망 노랑 빨강

형형색색 멍투성이 위 찢긴 상처의 질감까지

퍽 예술이다.

내 무관심의 붓자국으로 완성된 이 대작 앞에

그만 나는 할 말을 잃는다.



<눈길>


새벽 5시 길 나설 때에,

너에게 원망의 눈길을 보냈다.

아는지 모르는지 쳐대는 몹쓸 장난.


삐약삐약 유년시절 운동화 소리는 웬 말이냐

외할머니 뽑아주시던 가래떡의 그리움 길이처럼 늘어지는

저 흔적은 또 웬 말이냐


내가 손을 내밀지 않으니 너는

애꿎은 발에 심술을 부리는구나.

신 위에 올라타 엄지발가락을 깨물어대는 못된 녀석.


네가 아무리 놀자 하여도

너의 장난에 내가 다시 돌아가야함을 모르느냐.


나의 흔적은 결국 더 깊게 패이고 만다.


아직 잠들지 않은 가로등의 부추김에 건네는 너의 반딧불 같은,

어쩌면 위로일지도 모를 장난에 나는

눈길이 시리다.



<노을>


순응의 빛이여

그 고운 빛깔은 어디서 우려내었는가

애달픈 농도를 나는 가늠치 못하겠네.

아려오는 상처 위로

애타게 떨어뜨린 용서의 눈물인가.

황홀한 그 배합을 알 길 없이

그저 바라볼 뿐이네.

마침내 한 움큼 흘려버린 흔적 위로

은은히도 번지는 주홍빛 은하수.


Articles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