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시린 날이 있다.
잔인하게도
다시금 서린 물이 채워지는 날.
저 빛이 나의 색마저 모조리 뽑아갔는가.
흑백이 되어 걷는 나의 옆으로
에메랄드빛 추억들은 지나간다.
시계의 모래가 막힌 듯한.
까만 나무들이 다가가지 않았다면
시간조차 가늠치 못할 빛.
저 묘한 찬란 앞에 느끼는
무의 외로움.
가장 차분한 행복.
나는 말없이
이 작은 행성 대신 붉은 트랙 위를 공전하다
이내 정처 없이 빛에 이끌린다.
저 시린 빛을 껴안고 싶다는 욕구.
그러나 그는 금세 사그라들고
태엽 풀린 오르골만 멍하니 남는다.
<공상>
낡은 쪽배 누워
날개를 위로 접어들고 영겁을 노래하면
낙서처럼 마구 얽히는 영롱한 이파리 내음
그와 함께 별처럼 들이치는 역광을 음미하며
늪 속으로 사정없이 빠져든다.
고요한 질척임.
그만 멈춘 것은
나인가
아닌가
체온마저 그에 동화될 때쯤
늪은 모래바람처럼 흩날려 사라지고
어느새 억새풀만한 한자락 바람만이
남는다.
<대작>
굳게 가리었던
골방의 커튼을 확 제꼈다.
벽지를 온통 장악한
그들을 보고 까맣게 소름이 피어난다.
온몸의 역병이라도 닦아내듯
혐오의 손길로 박박 문지른다.
장렬히도 박아내린 뿌리가 멍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까망 노랑 빨강
형형색색 멍투성이 위 찢긴 상처의 질감까지
퍽 예술이다.
내 무관심의 붓자국으로 완성된 이 대작 앞에
그만 나는 할 말을 잃는다.
<눈길>
새벽 5시 길 나설 때에,
너에게 원망의 눈길을 보냈다.
아는지 모르는지 쳐대는 몹쓸 장난.
삐약삐약 유년시절 운동화 소리는 웬 말이냐
외할머니 뽑아주시던 가래떡의 그리움 길이처럼 늘어지는
저 흔적은 또 웬 말이냐
내가 손을 내밀지 않으니 너는
애꿎은 발에 심술을 부리는구나.
신 위에 올라타 엄지발가락을 깨물어대는 못된 녀석.
네가 아무리 놀자 하여도
너의 장난에 내가 다시 돌아가야함을 모르느냐.
나의 흔적은 결국 더 깊게 패이고 만다.
아직 잠들지 않은 가로등의 부추김에 건네는 너의 반딧불 같은,
어쩌면 위로일지도 모를 장난에 나는
눈길이 시리다.
<노을>
순응의 빛이여
그 고운 빛깔은 어디서 우려내었는가
애달픈 농도를 나는 가늠치 못하겠네.
아려오는 상처 위로
애타게 떨어뜨린 용서의 눈물인가.
황홀한 그 배합을 알 길 없이
그저 바라볼 뿐이네.
마침내 한 움큼 흘려버린 흔적 위로
은은히도 번지는 주홍빛 은하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