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차 창작콘테스트 시 공모 - '수위(水位)' 외4편 new

by 칼눈이다 posted Mar 0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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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위(水位)

 

물이 얕으면, 다치기 쉬워

물이 깊으면 당연하게도, 빠지기 쉽지.

수영을 배운 적 없는 내가 물높이를 깨우친 곳

계곡에서 물수제비를 던지다 갈비뼈를 다치게 한 동무를 원망할 필요는 없다.

갈비뼈가 물에 잠겨 있었다면 다치지 않았을 수위

시퍼렇게 피멍이 든 자국을 보며

뼈저린 수위의 중요성을 직감하는데

 

그래, 산다는 것의 수위는 어떠한가.

모르는 척 걸어가다가도 사고처럼 물에 잠겨버리는 맨홀은 적당한가.

수위가 높은 만큼 속도에 뒤쳐지는 물을 경멸해야 하는가.

흐름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

역류가 없는 물살에 수위를 가늠한다는 건

마찰에 정도正道를 떠나 헤쳐나갈 길 하나 짓는 것.

길은 내는 것이 아니라 건설해야 한다는 밥공기가 비어 있다.

 

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헹구는 수도승은 수위에 대해 과연 갈증을 논할까

그래, 갈증이란 수위의 장난. 턱 끝까지 차오른

익사하기 직전까지 내몰린 것은 아사 직전의 갈증에 다름 아니야.

부족한 사랑에 내몰렸다는 진부한 말은 통하지 않아 가늠할 수 없는

삶의 수위는 얼마 정도가 적당한 것인지, 금액을 점쳐볼 수 없음에도

밥공기가 엎어진 어둠을 나는 잘 모른다. 그래서 부끄럽게도

복사뼈까지 차오른 수위에 감사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넘어져야 느낄 턱을 갈증까지만 남겨둔 채,

 

수위의 협잡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래서 나는 거짓말쟁이다.

 

 

 

깊이의 대칭

비가 오는 날에는 아스팔트가 축축하지.

자동차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도로를 질주하는데

멀리서 그 광경을 보아도 빛은 수직으로 보여.

아스팔트 위에는 모습이 뚜렷한 자동차가 있고,

아스팔트 밑에도 눈물이 번진 눈으로 보는 듯

형체가 일그러진 자동차가, 마주본 거울 속 형상이 빛의 속도로

분열하듯 수직으로 길게, 고무줄처럼 늘어나 있어.

사물을 본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눈으로 보는 것은 과연 눈 밖으로만 향하고 있는가?

밖으로 향하는 만큼 안으로도 향하고 있다.

비오는 날 젖은 아스팔트에 비친 흐릿하고 몽롱한 세계처럼,

사람의 눈은 대상을 보는 깊이만큼 무한한 거리다. 하여

본다는 것은, 보는 깊이가 보여지는 것이기도 하다.

깊이는 형제가 모호하여 실체와 겹치지 않는다. 완전히

같을 수 없는, 어긋나버린 대칭의 합일점을 찾으려

자동차가 빗물을 튀기며 질주하듯 의미를 늘여가고 있다.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에는 관점이라는 폭발력이

저 자동차처럼 끝을 찾아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정지를 하고서야, 끝이란 없음을,

사실은 이곳이 끝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아래와 위가 다르지 않고 한몸임을

추신 : 깊이는 선명함을 역설한다.

 

 

 

 몸펜

 

 기권이란 존재의 모순임을
 펜 돌리기를 통해 깨달았다 학창시절 처음

 짝에게 이 몹쓸 습관을 배운 이후, 나는
 어제 먹은 역사를 토해내지 않기 위해 자꾸만
 나 대신 펜을 돌렸다.
 너무 정직해서 항상 지금인 시간에도 내밀한 속도가 있다면
 고통과 비례하는 마찰. 숨이 끊어지기 직전처럼
 순간 순간 순간 같은 순간도 없을 것이다.
 도르레와 말馬의 족적이 그래프를 그리던 고등학교 물리시간,
 사념은 항상 창 밖 수평선을 향하고 있었다.
 시곗바늘보다 몇 미터 빠르게 돌리고 있던 펜은 자꾸만
 검은색 기다림을 토해냈다.
 나는 문과일까, 이과일까?
 졸업을 하고서도 나는 좌뇌와 우뇌를 자꾸 헷갈렸다.
 대립은 서로 닮지 않아서 대립일까 너무 닮아서 대립일까?
 대립은 왜 항상 사이에 금이 가있을까 무엇이
 좌고 무엇이 우일까?
 따지려 들면 사방이 대립이었다 이 공간이, 허공이! 그리고
 혁명이 일어나는 순간마다 역사의 마디마다.
 나는 이제 역사의 일방통행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침묵만이 능사가 아니지만 말이 행동보다 빠를 때
 수면제를 먹고 고속도로를 질주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기다림을 토해내던 펜 돌리기를 멈추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헛구역질이 났다.
 몸이 펜이 된 것이다.

 

 

 

임계점

      

 엔트로피 분수령

 에너지 혁명을 일으킬 때 겪게 되는 경계선.

 인류는 파괴를 자행하며, 보다 고효율

 응집된 에너지를 찾는다. 그것은

 본능일까

 열기 속에서 분자는 활동이 산만해진다.

 엔트로피는 무질서의 양이다.

 모래시계 속 모래는 중심을 통과할 때 찰나 분산한다.

 바닥에서 산 모양으로 질서있게 쌓인다.

 무질서는 여기에 있다. 이 안에 있다. 차이는

 미시적이고 폭발적이라는 소설 만다라 구절,

 해변이 파도를 밀고 당긴다. 태풍의 부피가 북진할수록 부풀어 오른다.

 지속이란 무엇인가,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원뿔의 사유

 그것은 시간 문제이다.

 명제를 세운다. 논리가 있다. 전제가 있다. 그러나

 대전제를 믿지 않으면 논리는 바보가 된다. 언어의 맹점,

 믿음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언어는 성립되지 않는다.

 모든 학문은 언어를 바탕으로 세워진다.

 사람이 언어를 초월할 수 있을까, 그것은

 마음의 문제, 때로는 말이 없는 것이 말보다 중요하다.

 꽃이 나로 보여지는 수동태, 대기가 에테르라면

 내가 내 안에 있다는 지구를 느낀다.

 아름답다는 말은 그렇게 보기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시어로 확인하고 있지만 넘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애절함이라고 해야 할까, 고개를 들어 젖은 빛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보는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닌 오감이 하나된 육감.

 차이는 현상 본질은 동일성이라는 우주인 아이즐리의 말

 그리고 혼효면,

 자신이라는 변별적 자질, 자신이 자신으로 가장 강할 때

 느낄 수 있다.

 숨이 턱턱 막히면 전진할 수 없지. 사람이 호흡을 넘을 수 있는가

 고비를 넘긴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겠지. 비록, 힘겨울지라도

 모래시계를 뒤집는다.

 

 

 

 

 파도의 직유 

 

 

 어제의 끈을 놓지 못한 채
 파도를 배우러 바다에 왔다.
 파도는 쉼 없이 과거를 쓸고 또 미래를 덮는다.
 손거울 하나 덩그러니 파도 밑에 깔아 본다.
 그래, 거울이 역사의 얼굴이라면
 파도는 곧 역사의 직유.
 역사가 이 풍경처럼 맑아야 하기에
 파도는 끝없이 청소를 반복하는 것일까.
 묵은 해가 뒷걸음질로 떠밀려 가면
 새로운 해는 또 한 성큼 다가온다.
 한여름, 태풍이 비구름을 몰고 오기라도 하면
 파도는 지지 않겠다는 듯이 으르렁거리며
 하얀 포말이 거친 정념의 세월을 몰고 온다.
 풍파라 말하기엔 아직도 민망한, 청춘
 나의 파도는 얼마나 많은 모래를 쓸고 또 주워 담았는지
 허망하게 스러져가는 저 모래들 중
 한 알 만큼이나
 작은 희망 하나 움켜쥐고자
 나 여기에 작은 무덤 하나 덮어 둔다.
 비석은 조약돌,
 봉분이 죽음과 함께 촉촉히 젖어 씻어 내리고
 조약돌이 파도의 칼날에 여지 없이 깎여 나가듯
 나도 내 삶을 낮게 씻고 또 둥글게 깎아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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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김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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