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차들이 도로 위를 쌩쌩 달리고 있다.
푸르른 가을 하늘을 여유롭게 올려다볼 세 없이 어딘가로 쌩쌩 달리는 운전자들이 가엾다.
도로변 가로수 길까지 쭉 이어진 인도에 은행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샛노란 은행나무가 주변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은행이 떨어져 시멘트 도로변을 뒹군다.
은행을 밟아 터뜨리면 고약한 냄새 때문에 숨을 참아야 한다며 은행을 피해 요리조리 걷던 너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너에게 은행나무 잎을 가져다주고 싶다.
네 거무스름한 얼굴을 노랗게 비추던 은행나무를 너도 그리워할까.
네가 있는 그 곳에도 은행나무가 있을까.
악몽의 흔적
눈꺼풀의 무게는 지난밤 악몽의 흔적이다.
흐릿한 악몽의 기억들은 여전히 주변을 맴돌고 있다.
제멋대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기괴한 모양새가 되어 괴롭혀 온다.
오후 사무실 풍경은 회색빛으로 가득하게 물들어 있다.
곳곳에 놓인 칸막이 사이로 그늘진 동료들의 얼굴이 익숙한 모습으로 시야에 잡힌다.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들의 얼굴은 악몽의 흔적이다.
어스름한 빈 집에 불이 켜진다.
악몽의 흔적이다.
스산한 기운이 맴돌고 있다.
악몽의 흔적이다.
익숙한 고통의 향기, 퀴퀴한 냄새가 난다.
악몽의 흔적이다.
까슬까슬한 이불의 감촉이 무릎에 닿았다.
악몽의 흔적이다.
곧게 뻗은 어지러운 선들이 정신없이 천장위에 뿌려져있다.
악몽의 흔적이다.
킁킁의 구애
킁킁, 킁킁.
콧구멍을 서너 번 크게 벌렁거리다가 마지막으로 크으응.
뱃속 깊은 곳까지 음식의 냄새를 들이마신다.
그만 할 수 없어? 여긴 집이 아니야. 분식집도 아니고. 고급 레스토랑이라고.
여자의 애인이 얼굴을 붉히며 여자를 나무란다.
아랑곳하지 않고, 음식이 식을 때까지 계속 냄새를 맡는다.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여자를 힐끔힐끔 쳐다본다.
그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도 여자를 쳐다보기 시작한다.
저 멀리 구석 테이블에 앉은 커플은 킁킁 대는 여자의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고개를 쑥 빼고 상체를 앞으로 미는 수고까지 들인다.
여자는 애인의 긴 한숨 소리를 듣고, 킁킁 거리는 것을 잠시 멈춘다.
이번 애인도 곧 자신을 떠날 것을 예감한다.
여자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냄새 맡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킁킁, 킁킁.
번지점프
소파에서 내려와 거실 한 가운데에 드러누웠다.
천장 위를 바라보았다.
거실 천장에 달려있는 조명 장식구를 보고 있자니 번지 점프 장이 떠올랐다.
손을 쫙 펴고 뛰어 올랐다.
장식구에게 닿고 싶었다.
번지점프대에 닿고 싶었다.
추락하고 싶었다.
마음 껏.
밑으로.
끝까지.
아무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듣지 않는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개가 될 것이다.
아무 것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 아무개.
아무런 존재가 아닌 아무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