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창작 콘테스트 시 부문 응모

by 케민주 posted May 1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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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절모를 쓴 A

내가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을 때

그는 뿌리깊은 불안증을 앓고 있었다

 

햇볕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달아오른 칼날이 발밑을 끊는 것 같았다던

그는

문득 슬퍼지는 순간이 있었노라고

녹음 테이프 돌아가는 앞에서 증언했다

 

입 안에서 짭조름한 커피잔을 감싸면

시원해지는 것도 순간뿐이라고,

고향을 세 번째로 떠나던 날에

슬픈 듯이 먼저간 연인이 자기를 보지 못한다는 게

그렇게 비극같았더랬다

 

그는 도시에서 살기엔 너무나 연약하고

하찮은 짐승이었다

항생제와 동그란 사료과자로 살았다

맞춤정장에 구두까지 하얗게 신고선

화보 속 팽팽한 야생의 근섬유를 부러워하기엔 

이미 오랫동안 길들여진 우리에서

나고 자란 초라한 태생에 익어 있었다

 

그에게서 사진을 받아 들고

나는 그의 옛 얼굴을 보았다

아주 오래 전, 그의 다리가 초원에 섰을 때

어깨가 버터처럼 젖어 녹아버리고 없던,

 

그 뒤로 그와는 만나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나오면

창백하게 질린 하늘에 새 뺨이 울고

 

베란다 난초가 붉게 익고

 

꼴깍꼴깍 해가 떨어지고

 

밥솥 안에 밥은 식고


골목길로 장 봐오는 손이 파랗고.


등대를 세우고

오래 전엔 바다에 사람을 묻었지

살이 오른 고기와 바꿔 남자들을 데려가니

저 아래엔 신이 궁전을 짓는다고

파도에 삼켜진 아이는 일찍 천국에 데려간 거라 했지

그렇게 어린 친구 하날 잃었지


어릴 적 모래사장에서 주운 돌은

햇살에 탄 뼈처럼 밝은 색이었지

일곱 살 잃어버린 돌은 바다로 돌아가

젤리처럼 배를 갈라보면 찾을 줄 알았지


수많은 밤 물고기들과 함께 뒹굴면

햇빛이 밑바닥까지 깔리던 꿈들로

나는 젖을 먹고 자랐지


그리고 열일곱

처음으로 사랑한 여자를 바다에 던졌지

골이 빠진 그녀의 몸은 아주 가벼웠는데

바다는 제대로 품에 안고 돌아누웠네


나는 이제 물가를 떠나 산에 살지만

지금도 바다를 보면

해구를 비추는 하얀 볕과

무덤 속에 퉁퉁 불은 머리카락이 생각나


저 물 안에선 지금도

마음이 따뜻한 물고기와

밤에도 흰 하늘과

잠들어 깨지 않는 사람들이 있겠지


흙을 채운 바다에 있던 사람들은

이제쯤 하늘로 갔기를 바라

물결이 깨지는 날까지

나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기로 했지


자장가

그는 슬픈 노래를 자장가로 불렀다. 지친 아이들이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면 담배 냄새 나는 숨결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못 부르는 음색이 잣는 노래 클레멘타이,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던 어머니는 자장가를 불러주진 않았고 늦은 밤에만 오는 그는 아이들을 발에 올려 앉히고 비행기를 태웠다 아이들이 일찍 잠이 들면 끌어안고 부르던 노래 클레멘타이. 그는 아이들이 잠든 후에는 거실로 나가 텔레비전을 틀었을 것이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그는 밤에만 되살아났다 날로 검어지는 얼굴을 드리우고 형광등 아래 서서, 그의 이름 앞에는 무슨 장이고 이사고 화려한 직함이 붙었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의미를 뜻하진 않았다 따가운 땡볕 아래 빨개지고 노래지는 그의 얼굴빛은 검은색. 자켓은 땀에 절고 허리는 굽어가다 유배 당한 거실에서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으로 가득 채운 그의 옆은 비었다. 클레멘타인은 어디로 갔을까 그녀의 아비는 바닷가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데. 슬픈 노래를 자장가로 부르던 아비는 얼굴에 주름살이 세월처럼 늘어졌다. 정년 퇴직을 바라보는 나이 뒤늦게 집에 들어앉지도 못하고 끊임없이 떠나야 하는 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딜 갔느냐


그의 집에는 이제 두 명 분의 기척이 사라졌다. 이제 가면 내려올 길 없는 길. 바라진 않았으나 보내는 것이 미덕이리라. 그는 홀로 남고 바닷가에서 그물을 삼는다. 바다에는 이제 고기가 없으나.


잊혀짐의 미학

그 누구도 썩어가는 과자처럼 잊혀져선 안됩니다

그 누구도 필요한 것보다 더 눈물 흘릴 수는 없습니다

 

사십 시간을 눈알 빼는 도시에서

우리는 미래 없이 일을 하고 닭장 같은 구획에서

일을 하고 먹고 산다

 

잠이 없는 날들이다

헐값에 팔려나가고

헐값이어도 좋으니 사가만 달라고

애원하는 양동이들

 

누가 저 눈빛을 보고

저 먹으려고 희번득대는

저 치들을 파렴치하다 하는가

교활하다 이름붙이는가

 

날벌레가 나르는 하늘에서

빨간불 없는 두부모들 판 위에서

수증기입니다 씌인 파란 지붕 연기에서

 

이름 적기 무서운 사회에서

내가 되기 두려운 삶에서

 

우리는 모두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잊혀질 수 없습니다.



계민주/alsl829@naver.com/0102737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