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천히요 >
노을은 지는데
여적지
밭에 계신 엄니
등이 휘는지
계절이 도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고랑 사이를
절룩거리며
옮겨 다니신다
산비탈 아부지
봉긋 누운 자리에
눈인사하고는
곧 보겠다며
웃으시는데
나는 울고만 싶다
아부지요
천천히요
아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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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친구 선녀에게 >
이제 와서
무엇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나무꾼이 선녀 옷을 숨긴 건지
선녀가 노루를 매수한 건지
아무튼
유행 지난 날개옷은 중고로 내놨고
삼단 같던 긴 머리 대신 동네 미용실서 머리를 자르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걸 보면
여기도 꽤 살만하단 생각이 들어
혹시라도
인간 세상에 나 같은 방법으로
들어오려는 동기들이 있거든
제발 말려 줘
공중위생법에 걸리고
잘 못 하면 음란행위로도 구속감이래
영원한 삶을 살아갈 네게
유한한 시간을 선택한 나는
어리석고 눈물 나는 친구겠지만
다시 시린 달빛 아래 선대도
선택은 같을 거야
언젠가
나 없는 순간이 오면 그땐
아이들을 바라봐 줘
그 속에 살아 영원히 네 곁일
나를 기억하면서 말이야
안녕?
그리고 이제 정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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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소리 >
초여름 장맛비 아래
녹두 빈대떡을 지진다
후두두 빗소리
지글지글 부침 소리
군침 도는 돌림 노래
처마 밑 세든 제비
연미복을 빼입고
볏짚으로 지휘를 하면
장단 맞춰 강아지 왈 왈
우리들은 둘러앉아 침만 꾸울~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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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백양나무 숲 >
소망으로 가득 찬
둥근 달이 뜨면
은백양나무 숲으로 갑니다
새들도
심장을 포개 잠든 고요한 밤에
은물결로 반짝이는 지상의 빛 무리
올려 본 하늘에는
무수히 쏘아 올린 염원들이
별 되어 걸려 있고
나는
하늘의 별과 지상의 별 사이에서
아득히 시간을 잊습니다
기억의 오솔길에서
꿈 많던 소녀를 만나고
지쳐있는 오늘을 마주하면
표주박으로
소망을 길어 둥근 달에
붓고는
잉태를 바라는 여인처럼
만월을 머금고
은백양나무 아래 섭니다
달빛에 반사된
천 개의 눈동자들이
앞다투어 위로하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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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의 행복 >
여린 부리 한가득
이슬 모이 머금고
옹기종기 모여 있던
초록 병아리
날마다 한 뼘씩
마음도 자라
소풍을 떠나려고
기지개를 켠다
모든 걸 나눠주고
빈몸으로 돌아누우면
몰라줘도 서럽지 않은
고단한 행복
바람이 위로하듯
토닥여 주니
달빛 이불 덮고
흙으로 돌아가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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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자 : 김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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