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空間)
그대가 필요할 때에 내가 없었다.
내가 필요할 때는 그대가 없었다.
지금 그대와 함께 하고 싶지만,
이젠 그대에게 내가 필요 없다.
그대는 나의 태양.
나는 늦가을의 해바라기.
그대를 바라보려고 노력하지만
그대는 나를 너무 일찍 저버린다.
내 입술이 그대에게 더 절절했다면
그대가 나를 더 기억할까.
지금도 잊지 못할 진심이었다는 것을
그대는 이해해줄까.
Gloria
웅장한 나팔소리와 군중의 환호.
노래하는 입과 경배하는 몸.
흩날리는 꽃잎과 시원한 바람.
햇볕은 그를 위한 스포트라이트.
눈을 감아버렸다.
귀를 막아버렸다.
입을 다물고 말한다.
‘과분하다, 그쳐라.’
그러자 모든 것들이 멈췄다.
움직이는 그늘이 뜨거운 조명 빛을 가린다.
영원한 영광은 없는 것을 알기에
조용한 걸음으로 군중을 지나친다.
기시감
분명히 처음이다.
하지만 익숙하다.
설명할 수 없지만,
너는 나에게 그렇다.
그래서 더 조심했다.
친근한 널 조심한다.
내 잔에 비친 당신을
바라보기만 할 것이다.
분명히 너를 잊으려 취했는데
오늘도 네가 나를 취하는구나.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은데
그러지 않는 내가 밉구나.
학생
왜 그리도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가?
- 삶의 무게를 견디는 법을 경쟁하느라 그럽니다.
왜 모두들 같은 옷을 입고 생활하는 건가?
-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하게 사는 법을 배우느라 그럽니다.
왜 반나절을 갇혀 사는가?
- 소속이 나를 보호한다는 것을 배우려고 그럽니다.
그래서 자네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 그건 아직 배우지 않았습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대한민국엔 아직 이런 현명한 학생이 없다.
Apocalypse
초침이 어제의 나와 계약한 때에 이르자 요란하게도 포효한다.
내가 누운 늪에서 빠져나오기에 내 의지는 늘 너무 부족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시간에게 물었고 시간은 내게 답을 해줬다.
나는 초침이 되고 초침은 내가 되어야 한다.
열심히 돌아도 결국 한자리를 맴도는 것 같은 기분.
내뱉어도 다시 삼켜야만 하는 숨과 같은 것.
순환은 한결같다는 점에서 악순환이다.
순환은 반복된다는 점에서 안정적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 한결같이 반복한다.
세상이 어두워지고 모든 숨 쉬는 것들이 숨을 곳을 찾아 떠났다.
나 역시 다시 누울 곳을 찾아 돌아왔다.
눈을 감기 전, 다시 초침과 계약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된다.
이제 파멸의 비락은 익숙하게 되었다.
강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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