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일 위를 달리는 여자 외 4편 응모합니다!

by sujinpong posted Jun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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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일 위를 달리는 여자



껌처럼 붙은 여자가 있다

덜커덩 덜커덩, 머리를 질끈 동여 맨 여자

종착역엔 등걸잠 자던 플라타너스 몇몇만 마중나왔다

풍경들이 줄지어 선 곳에는

꽃의 온기로 가득한 달빛이 진득하게 고여있고

일회용뿐인 만남들만 남은 뒷좌석에서

여자는 팔리지 않는 껌처럼 붙어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여자를 질겅질겅 씹어댔다

사람들은 기차 안의 꽃향기마저 데리고 내리고

뜬 눈으로 밤샌 별들을 말없이 부랑하기를 반복했다

곱씹을수록 얇아지는 표정을 걸치고 제자리에 쓰러진다

어째서 그녀의 꿈은 단 한 번도 부푼 적이 없었던 것일까

밤은 여자가 머무는 자리마다 굳게 문을 닫았고

그때마다 여자는 언젠가 올 막차를 기다렸겠지

여자는 자신을 닮은 노파가 주저앉는 것을 보았고

함부로 질겅이던 젊은 시절은 가래침처럼 뱉어졌다.

단물 빠진 아침은 차고 딱딱한 건물이 되어

여자를 내려다본다

대합실 칸은 또다시 적막이라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여자의 종착역은 늘 가파른 곳이었다

어젯밤 어둠은 길게 늘어진 개밥바라기를 자꾸만 씹어댔고

구름은 여전히 레일 위를 달리는 중이다




빈꽃



꽃 한 송이가 피었다

꽃은 화분 안에서도 나비의 잠을 탐냈다

계절과 시간은 몇 줌의 바람과 햇볕과 씨앗을 품어주었다

제 몸에 큰 화분 안에서도 꽃은 무럭무럭 잘 자랐다

나는 꽃의 온기를 먹고 자랐다

창가에 자리 잡았던 꽃은

나의 성 안에서 말라갔다 향기를 품지도 않았다

줄기는 숨통을 옥죄여왔고

더 이상 환하게 비춰주지 않는 꽃에게,

나는, 겁이 많아졌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서면 언젠가 너를 내려다보게 될 줄 알았어

풍경을 감당해내기에 벅찰 때, 커튼은 비에 젖고

팽창하는 둘 사이에서 시간은 오랜 갈증을 선물했다

네가 시들 때마다 우리 집은 둥글어졌다

식탁 위에 놓인 오렌지 쥬스, 달걀과 토스트,

흑백으로 그려진 초상화, 그리고 섬

모든 게 꽃의 숨을 타고 흘렀다

네가 내게 모질게 굴어서 네 향기를 훔쳤던거야

유일한 변명은 더 이상 자라나지 않았다

너의 아름다움을 사랑해서

나는 오랫동안 가뭄이었다




초승달엔 바람의 유통기한이 있다



간판 없는 슈퍼, 달빛이 반쯤 접힌 해수욕장에

우두커니 서 있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슈퍼라고 불렀고,

‘행’자에 붙은 ‘ㅣ’는 틈만나면 파도소리에 놀라 떨어져 나갔다

허리가 파도만큼 굽은 노파는

백사장 위에서 동백아가씨 노래를 붙잡고,

자신의 젊은 시절 속을 헤엄쳤다

레이스가 치렁치렁한 밤, 딸기잼보다 부패되기 쉬운 밤,

낡은 슈퍼처럼 노파도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초승달의 호미질이 자꾸만 노파의 등허리를 파먹었다

선인장 가시처럼 돋은 불면증과

풍선껌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은 유통기한에는

태어난 날은 없어도 가야할 때는 빼곡히 적혀 지워지지 않았다

불량식품 같은 노파의 이야기들이 다시 진열될 수 있을까

구석진 자리엔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몸을 싣는 해란초가

팔리지 않는 상품처럼 웅크려있다

쓰레기에 뒤범벅된 바람이 슈퍼 안을 비집고 들어온다

종소리가 났다. 짤랑.




엄마라는 꽃



‘꿈꾸는 화원’ 간판 위로

누긋한 보슬비가 한 잎씩 피어나요

아침은 화장기 없는 얼굴처럼 희끄무레하고

엄마는 어제 죽은 안개꽃의 향기를 곳곳에 묻어주고 있어요

오늘은 우리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게요

‘꿈꾸는 화원’에서 나고 자란 나는

또록또록, 낡은 유리창에 달라붙은 빗방울로

엄마의 뒷모습에 꽃봉오리를 틔워내요

당신은 꽃보다 아름다워요, 아버지가 청혼했다는

장미는 가시만 더욱 날카로워졌어요

사람들은 엄마의 젊은 시절을 함부로 사갔고요

남겨진 엄마는 피고지기를 반복했어요

파르르 몸을 떠는 아이리스는 물도 잘 마시지 못하고

햇살은 길고양이처럼 자꾸만 달아났어요

그래서 나는 꽃이 필 때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았어요

꺾꽂이 된 엄마만 진열된 화원에서

엄마는 이 모든 풍경들을 예쁘게 포장했어요

키 작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뿌려진 골목엔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목소리만 자꾸 고였고요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처럼 가벼운 하늘엔

붉은 빗소리만 하염없이 무너져 내렸어요

어째서 누구 하나

우리 엄마의 생을 가꿔주지 않는 걸까요?

엄마는 내게 영원한 향기는 없다고 습관처럼 말했어요

그래서 나는 그 말을 내 좌우명으로 삼았어요

밤바람은 고요를 피워내고

엄마의 젖은 꿈이 나비의 투명한 날갯짓마냥 파닥여요

동백아가씨 노랫말을 주섬주섬 주워 담는 엄마,

나를 잊지 말아주세요

‘꿈꾸는 화원’의 이야기들이

다 익은 꽃씨가 되어 떨어지고 있어요




바다는 잠들지 않는다



밤이 너무 쉽게 찾아왔지만 바람의 탓은 아니었다

달이 방향을 잃은 것을 탓해

노 저어 온 길은 죄다 낡고 낮은 집들이었다

집채만한 크기의 파도는 항상 목구멍 안에서 헐떡였다

간신히 한 끼의 새벽을 문 달은 두껍게 풀칠되어 있고

외딴집마냥 붙어 빈속을 달래기에는

바닷바람이 자꾸만 혀끝에 감돌았다

갯바위는 어린아이처럼 알몸으로 떨었다

어부의 외투 안에서 배는, 시시때때로 전복됐다

순항하기 위해선 바람을 거스를 줄 알아야한다

출항의 준비란 늘 불온해지는 법이야

바다는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는 아이의 뒷모습을 집어삼켰다

물러서야 할 자리에서 순종(順從)이라는 것을 배웠다

파도의 힘이 바람의 목덜미를 쓸고 간다




이름 : 김수진

전화번호 : 010-7494-0411

이메일 : sujinpo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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