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차 창작 콘테스트 시 공모 - 꽃무늬 장화 피우기 외 4편

by 탱탱볼 posted Jun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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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늬 장화 피우기


우리는 늘어진 고무줄 사이에 고인 말들, 웅덩이에 빠져 발가락이 끈적거려도 우산을 펼친다 꽃무늬 장화를 벗어놓고, 신발 구멍을 향해 우산 위에 맺힌 빗방울을 뚝 뚝, 장화 속에 고이기 전까지 파문은 벌어지지 않는다


베란다에 젖은 우산을 펼쳐 놓고 흘러내린 빗방울을 잠들기 전까지만 두드려본다 잠에서 깨면 우산은 더 떨어트릴 입을 잃어 접힐 준비를 한다 베란다 저편에서 귀머거리 소녀가 새하얀 원피스를 펼쳐 빗소리를 담는다


꽃무늬 장화를 언덕 위에 둔다 구름의 기울기는 물뿌리개와 달리 신경질적이야 집에 도착하면 적어도 신발장에 대해선 더 할 이야기가 없을 텐데,


어느새 무늬만 무성한 언덕이다


빗방울이 꽃무늬 장화 위에 수북하게 떨어지고, 나는 무늬를 휘저었고, 빗방울이 떨어진 곳으로부터만 빗소리가 튀어오르는데, 허공에 새겨진 빗자국은 입 다문 하늘의 무늬라 하자


이부자리에 웅덩이가 생기는 나날이다 발자국 소리가 줄어든 언덕, 원피스가 이제 맞지 않는 소녀, 양말을 바꿔 신을 수 있다면 모두 같이 젖을 권리가 있을 텐데, 서로 늘어지는 입술을 부여잡은 채 꾸벅 꾸벅, 우리 무늬는 이제 지루해도 될 것 같다

 

한 걸음, 또 잠겼다

 

 


지는 말들을 위한 공동空洞


들은 잠에 빠지려던 내 얼굴에 석고 물을 부었지

엄마 닮았다는 소리 듣고 다니던 아들은 표정만으로 내게 효도한다고


나비넥타이를 맨 소년소녀가 웅변대회장으로 향한다

홀로 방울 달린 넥타이를 맨 아들은 거짓말을 잘했다


몸속에 행성이 떠있다고 말하는 아들놈 때문에 태어나서 처음 하늘을 고민했다


나는 가로등 아래에 웅크리고

쓰레기봉투를 들고 온 노모에게 복화술 인형을 뒤집어쓴 손을 내민다

나도 이제 아빠에요, 엄마


놀고 있네!


아들은 웅변 학원이 끝나고 아무도 앉지 않은 그네를 연신 밀어댄다

나비넥타이를 맨 아이들이 내 몸에 모래를 끼얹고

두꺼비를 기다리며 노래했고

나는 아이들 손금에 닿은 모래가 단지 부드러워서 가라앉는다

두꺼비가 오면 모두 삼켜지고 말 테니까


계속 떨어진다면 물론 그것도 날고 있는 거겠지


그러나 오늘 아들은 내가 사다준 방울 달린 넥타이를 매고 있다

그네 위에 떨어진 나를 해질녘까지 밀어대며


당신, 숨이 찰 때까지 떠들어도 소화되지 않는 말이 있어요 그건 당신이 흔들리는 동안 내가 한 발짝 물러나기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멀어졌다고 안심해서 고개를 들었다간 머리를 다칠 거예요 난 머리는 다치기 싫더라


아들의 목덜미에 달린 방울이 딸랑거릴 때마다

나는 조금 더 하늘에 가까워진 것 같다가도, 때론 조금 더 하늘에서 멀어진 것 같기도 한데


쉬지 않고 입을 놀리는 아들의 얼굴은 어쩐지

내가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표정들로 굳어지는 것 같다



세기의 작가 안녕 마담의 인사법, 0

 

 

0.

 

안녕 마담 (나의 생물연도는 그대의 정수리부터 보았으니 - 평생 작별 인사는 없을 걸세) : 안녕 마담은 어느 날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책에서 발부터 튀어나왔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책 겉표지를 찢어 내가 바로 네 엄마다(아이를 두고 엄마를 자처하는 여성이 주장하는 고집 : 역주)’ 라고 적은 뒤 종적을 감췄다 그날 세계의 모든 독자들이 안녕 마담의 한 줄짜리 선언문을 읽었고 독자들은 요 맹랑한 노부인의 정체에 대해 골몰하며 펜레터를 썼으니 그것이 바로 안녕 마담의 세기의 역작무제(어느 국가에선 이를 헬로우, 곤니치와 등으로 번역했으나 나는 언제까지고 당신의 인사를 당연히 여기고 싶다 : 역주)0장이다

 

1.

 

고양이의 제왕(나는 길거리에서 태어났고 - 사람들은 자꾸 내가 길거리에서 죽을 거라 믿는다) : 마담 봉쥬르가 정체를 실토하기 위해선 무언가를 먹을 필요가 있네 먹지 않는 자가 말하는 거 봤나? 나는 사람들이 버린 족발 조각이 참 좋아졌는데 애새끼들은 밥을 떠 줘도 안 처먹지

 

싫다는 말도 못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물론 우리는 밥 먹을 때 말이 없다 : 역주)

 

나도 한때 사랑하는 고양이풀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 며칠 동안 울지 않고 살랑거린 적이 있지 하지만 모든 침묵은 말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아 저기 또 멍청한 시인 하나를 움직여서 말하는 책상이 있군 밥을 먹는 건 오로지 토하기 위함이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사라지는 건 그저 다시 나타나기 위한 약속이지

 

내가 고양이라고 지금 이 자리에서 밝히는 이유는

언젠가 주인이 날 고양이 따위로 여기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야

 

3.

 

멋대로 가라앉는 타자기(나는 분명 2라고 쓰려 했는데 3이라 썼네 - 그렇게 여행을 하고 싶니?) : 마담 봉쥬르는 분명 죽었을 거예요 죽지 않는 이상 날 떠나는 친구를 본 적이 없어요 그녀는 정액 닦은 휴지가 가득 들어간 쓰레기봉투에 기대어 영원히 잠든 거예요 나는 잠자는 친구들을 죽었다고 밖에 부를 수 없어요

 

(나는 코 고는 여자를 싫어해서 매번 연애에 실패했다 : 역주)

 

친구들은 내 몸에 얼굴을 남기고 떠나요 아무리 오래 쓰다듬어줘도 얼룩이 남는다는 걸 그들은 왜 모를까요 얼룩을 지우기 위해 비를 내려주세요 그럼

난 망가지고 말 거예요 망가진 나를 들고 도로를 달려주세요 물론 나는 오래 전부터 당신이 살아 있다고 믿은 덕분에 딸꾹질을 하지요

 

망가진 키보드를 내려치며 울던 어린 시절이 있을 거예요

무언가가 망가진다면 그건 항상 애들 잘못이죠

당신을 조용하게 만드는 건 의심이었을까요

나로 인해 쓰이는 이름엔 얼굴이 없네요

 

2.

 

짝사랑(내가 낄 자리가 없어서 - 편지 한 장을 간신히 끼워 넣고) : 나는 마담 봉쥬르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는 이 문장을 번역하지 않았다 : 역주) 그녀는 내게 엄마라고 말했지만 나는 항상 엄마 같은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죠 그녀의 성기에 내 물건을 집어넣고 싶습니다 내 물건이 힘겹게 그녀 성기 속에 머문다면 물론 그건 배신입니다! 나는 번식을 위해 태어난 게 아니에요 (남자들이란 항상 자기 성기를 여자의 한 곳에만 집어넣으려고 하지 : 역주)

 

입에도 넣고 싶어요

(그랬다간 그녀는 영원히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 역주)

 

그녀에게 줄 편지를 썼어요

(읽는 이를 고려한 연애편지는 생길 수 없다 : 역주)

 

나는 밤새 그녀가 보고 싶어서 운다고요!

(그러나 아무것도 씻기지 못하고 이부자리에 누런 얼룩이 생긴다 : 역주)

 

역자 후기.

 

당신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요 당신은 왜 당신 글 속에서만 아무 말이 없나요?

 

너는 또 내 얘기만 잔뜩 써놓았구나

 

나는 당신 등 뒤에 분명히 서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사족이 되어버렸어요

 

물론 네 발을 가장 나중에 봤지, 나의 아들아

 

언젠가 빈 노트에 네 이름대신 자식 이름을 써줄 날이 올 거란다

 

그곳에 적힐 네 이야기들을 기대하겠다



笹舟


경도가 높아진다


입술에 생긴 점을 김 가루로 착각해 껍질이 까지도록 긁었다 가라앉은 체온, 태양을 찢으면 혀가 나왔다 어릴 적 따먹던 구름의 행방을 찾기 위해 보이스카우트 구조단이 무지개를 따라갔다 술 취한 회사원은 디스를 꺼내 물었다 와이셔츠 앞주머니에 들어간 디스를 보지 못하고 구조단은 길을 잃었다 연기는 중력 속에서 부유했고 하늘 속에서 사라지면 천장이 낮은 집으로 갔다 오늘도 자전거를 탄 소녀는 쓰레기장에 가서 인형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분명 다섯 시에 돌어오라고 했다 키가 같이 자라는 이야기가 없었다 밤마다 술 취한 회사원은 아내가 누운 침대에 걸터앉아 또 다른 재난을 궁리했다 자고 일어나면 햇볕에 탄 정강이가 가려웠다 오래 긁으면 오돌토돌한 봉우리가 생겼다 재난이 일어나지 않으면 몸 속의 동화는 정적 속에서 점멸했다 구조단이 오는 중이라고 회사원의 아내는 말했다 신문에서 나온 남자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아내의 손톱에 입김을 불었다 지하의 색깔을 욕조 안에서 그리던 때가 있다 나오면 거품이 남았다 술병을 깬 회사원의 주위에 구조단이 모여 박수를 쳤다 누구의 손금 속에 갇힐까 고민하던 때, 깨진 유리조각 안에 있던 배 한 척 선로를 이탈했다


지평선과 키를 잰다



거짓말 하는 피터팬

 

 

너희 집 창문 앞에 힘겹게 발을 디디면

그곳은 창틀이 될 거야

깊은 밤 창문 한가운데에 반사된 네 붕 뜬 얼굴

이것 봐, 갈라진 피부 속에서 아파트가 건설 중이고

콧속에선 농익은 사과나무가 가지를 추켜세웠지

두루뭉술한 구름 속에는 네 얼굴이 떠 있어

허름한 작업실에서 늙은 화가가 라면을 먹다 말고

어쩐지 너를 닮은 사람을 그리고 있어

네 얼굴을 찾으러 가자

너를 닮은 것부터 찾으러 가자

파라솔을 허리에 감고 해변에 떠오를 때까지

서리 낀 노숙자의 수염 한 가닥마저 너라고 부르자

오늘 네 얼굴이 떠오른 창문을 여는 내 손은

창밖을 향하는 동안 네 손이 될 거야

내 입이 닫힐 때까지 네 손을 붙잡고 있을래

 

우리 얼굴, 이제 좀 닮은 것 같지 않니?



김하늘, broumbrella@naver.com , 010-7273-2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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