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시킨 일
버스 차창 사이로 바람,
스민다 바람, 수풀을 섞어 여름을 차리고 있구나
차분한 아침, 얼굴을 감싸는 바람에
어른들의 말이 믿어지고
그 말들을 연습하며 어른들의 말을 믿게 된다
난 열심히지 않았던 거구나
후회를 버리면 바람, 넌 밀려가겠지
밀려서 밀려서 잡히지 않을 때쯤 넌
밀리고 밀려서 또 내게로 오겠지
오늘은 누군가의 말을 성실하게 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역시 오월, 차창, 바람에 똑같이
썰물 몰려간 빈 집에 바람 기억 머물렀고
밀물 몰려와 찰박 쓸려갈 뻔 하였지만
오늘만큼은 자신의 탓이었음을 쑥스럽게 웃어 보이길,
이 역시 바람
저녁노을이 당신의 얼굴 위로
세수를 마친 당신의 얼굴 위로 봄향이 지나갔다
복숭아를 닦아내던 손에 묻은 달풋한 냄새였다
당신은 복숭아를 좋아했다
지나간 사랑에 저녁놀이 서렸기 때문이다
봄이 하늘에 풀던 물감에 당신을 녹이면
말간 복숭아 빛이 번져가고 놀의 끝마저 파랬다
복숭아를 닮은 저녁에 당신의 어깨를 걸면
그 색은 곧 영원을 믿게 만드는 색이 되곤 했다
그날의 풍경의 색이 깊어져
문득 당신은 서랍을 열어 파레트를 꺼낸다
굳은 물감들은 색마다 서로의 색을 묻히고 있다
서로에게 엉키던 시간들을 분홍빛으로 멈추어 놓았다
무른 복숭아를 깨물어 우르르 즙을 내어 당신에게로 가고 싶다
혼자가 된 날
빵바구니에는 크로와상이 빗겨 놓여있다
누군가의 발, 그에 꼭 맞는 구두의 모양으로
울음 뒤 조금 짠 맛으로
버터의 그리운 향으로
겹겹이 애달은 슬픔으로
저 빵을 품 안에서 조금 더 구우면 알게 된다
가볍게만 느껴지던 빵의 그 미묘한 맛을
열일곱 층에 기억이 움직일 때마다
마음 벽면에 약간의 소금기가 맺히고
열일곱보다 짙은 버터의 향이 났다는 걸
소금의 결정이 저릿하고 버터가 숨을 쉴 때마다
아픔을 털어내어 조금씩 가벼워지고 정갈해졌다는 빵
비로소 혼자가 된 오늘에
오늘까지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는 걸
불이 꺼진 신발장에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나는 너의 환영과 함께 해서 더욱 외로워졌다는 걸
너를 지우고 났을 때 알게 되었다
열일곱 층 기억을 간직한 가벼운 빵의 맛을
나 이제 고단한 신발을 벗어 이윽히 자유를 향한다
달그림자의 밤, 깊다
사랑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사슴 한 마리가 샘물에 눈을 헹구듯
잔잔한 물기가 어리는 일이었다
이상하다 이미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사슴을 따라 잠시 너의 눈에 다녀왔으므로
너와 함께 너의 이름처럼 살고 싶어졌으므로
그러나 사랑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기에
얼굴에 한 줄 거미줄이 붙은 것처럼 미약한 기분으로
걸려 있어야겠다 나는 떼어져 나갈 것이므로
걸어둔 적이 없는데 너는 내게 오래된 달처럼 걸렸고
나는 네게 무게 없는 그림자를 기대었다
이상하다 너를 사랑하게 된 밤
하늘에 슬픔과 무관한 무수한 별이다
결국에 달그림자는 스러지는데― 그것과도 무관하게 수북이 별이다
각자의 낮달의 말
속은 엉망이고 피부가 까슬한 날이면
엄마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말씀하셨다
잠을 좀 자두거라
무성하게 자란 소음이 둥당거리는 밤
낮달처럼 그 말이 피어 오른다 거기 떠있다
잠들지 못하는 밤, 생각 한 편에 곤히 잠들어 있는 투명한 달
각자의 낮달의 말들이 거기에 있어주어 우리를 지속하게 했을 것
스러지지 않도록 우리를 투명하게 희석시켜 주었을 것
잠을 좀 자두었더라면 무언가는 달리 되었을까
평생을 어리석었는데 또 한 번 어리석다
낮달만 물끄러미 찾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