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회 창작콘테스트 시 부문 응모

by 박선호 posted Jun 0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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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소


싱긋한 나무가

메마른 장작이 되고

시커먼 숯이 되고

빛 바랜 재가 될 때 까지.


세월이 생명을 흐르듯

불이 나무를 흘러가며

숯 하나, 재 한 줌 남겨두지 않기를.


다시 한번 뜨거울 수도 있었을 숯은

시커멓게 미련이 되고

더 이상은 타지 못할 재는

빛 바랜 후회가 되기에



불의 탄생과 비로소 시작된

나무의 죽음에

더 이상의 세월은 깃들지 말아주기를.



출혈


깊은 상처는 하염없이 벌건 피를 내뿜고

하얀 눈밭에 흩뿌려지는 새빨간 꽃잎은 한없이 낯설다.

어설프게 가려둔 투박한 상처 사이로

애써 외면한 싱싱한 새싹이 한없이 생생하다.


영광스럽지 못한 혈흔은

찬 겨울 바람에 더 깊숙하고 은밀하게 눈 밭에 새겨진다.


철없는 새싹은 성장을 멈추지 못했고

매정한 새싹은 뿌리를 거두지 못한다.


새하얀 눈 밭 위 고꾸라지듯 그려진 붉은 꽃에

눈보다 하얀 겨울 나비 다가와 살포시 앉아줄까


기꺼이 맞이한 나비의 입맞춤이

꽃의 붉은 혈관 속을 비워줄 수는 없겠지만

눈물 아래 하얀 꿈은 온전할 수 있기를.




너에게 보내는 울림


너와의 첫 만남은

서서히, 공기를 물들어가며

징소리처럼 메아리 처럼 울렸다.


파도에 진동하며, 떨리며

넘칠 듯이 마구마구 다가와

나를 푸르게 그리고 하얗게 적셨다.


너의 영광스러운 주파수에 넋을 잃고

너의 황홀한 진폭에 영혼이 갇힌다.

너의 파도에, 너의 파동에 기꺼이 묻히노라.


나에게 닿고 튕겨나 너에게로 향하는

나의 희미한 반동이

나의 수줍은 물결이

그만큼 찬란할 수만 있다면.




나룻터


문득

정말 문득, 이세상에 대해

섬뜩할 만큼의 낯섦을 느끼며

소름끼칠 정도의 어색함에 몸서리 치며

비로소 세상에 등을 돌릴 때


나를 덮쳐오는 환멸의 강과

나를 감싸오는 고독의 안개에 질식해 죽을지언정


절대 저기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의연한 분노와 염오감에 휩싸인다.


어렴풋이 강물에 흐르는 달빛만을 보며

반쯤 망가진 뗏목에 몸을 싣고

짙은 안개를 뚫으러 가는 이의 뒷모습은

비로소 평화롭다.



입춘


날카롭게 수려한 꽃잎들은

너를 보고 고개를 들지 못했고


요란하게 향긋한 봄내음은

너의 곁을 지날 때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화려하게 돌아온 봄은

너를 만나 창피한 듯 주춤한다.


너여서 나에게는 눈부셨던,

비로소 너여서 나에게는 봄이 온 듯 하다.










응모자 : 박선호

이메일 : shp990925@naver.com

연락처 : 010-7130-2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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