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차 창작콘테스트 시 부문 응모

by 치킨한조각 posted Jun 04, 2019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우수

블라인드 사이로
새어 나오는 너는
우수라고밖에 형용할 수 없겠다.

왜 딱 저만큼의 틈을 벌려놓은 건지
네가 창을 내고 싶은 정도인 건지
다들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가는 우수가 눈에 밟히는 건
플라토닉하다고 변명할 수 있을 테지만
나도 이만큼의 간격이 적당한 이유는
새로운 계절의 시작인지
지나가는 바람인 건지 모호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기차

우리는 모두 기차를 탔다.
우리가 떠나온 곳에 두고온 명찰은 거기서 뒹굴겠지마는.

이름 잃어버린 사람들은 어른의 눈을 하고 있고 아이의 말을 삼키고 있지만
그 노력 비웃기라도 하듯
기차가 쉬었다 가면
사람들은 모두 아이가 된다.

경적이 울리고
사람들은 다시 이름을 잃는다.

기록

언젠가 읽힐 기록이어라.

그가 손으로 허공을 가른 것은
언젠가 바람이 바다에 적을 기록이니까.

언젠가 그녀의 바다가
표면에서부터
홀로 밤이 되는 것은,

태양에 비춰질 기록이어라.

실수

책상 위 물병 속, 물이 흔들린다. -그것이 정말로 물인지는 모르겠다.

네 동공이 흔들리는 건지 내 눈가가 떨리는 건지
찬찬하지만 평소와 다른 행동
희미하지만 평소와 다른 웃음

여기에 있을 용기도
그렇다고 나갈 용기도 없어
나는 그저 너에게 악수를 청한 것이다.

너는 평소처럼 여유롭게 말하지만
내가 청한 악수(握手)가 악수(惡手)가 되어
마음속에서 그 무언가가 떨어졌을지는, 혹시 모르는 일이다.

물이 엎을 듯 말 듯 요동치지만, 물병을 잡을 수는 없기에-
가슴으로 침을 삼킨다.

라면 국물

오늘 밤엔 옛날 친구를 만났다.

이 친구도 나처럼 학원에서 도망쳐 나온 것 같다.
단지 우리에게 다른게 있다면
이 친구는 밤거리의 풀냄새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뿐이다.

이 친구 이름이 지성이던가, 하여튼 지혜 지에 뭐였는데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편의점으로 들어가니 돈이 없단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내가 사주겠다 하고 컵라면 하나를 집어 든다.

컵라면에 물을 따르면서도 뭔가를 생각하기만 하는 지성이.
지성이는 갑자기 한숨 섞인 목소리로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린다.
그러더니 갑자기 학원엘 다시 가야겠다고 하며 라면 국물을 술처럼 들이킨다.
지성이와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번갈아 보다 옷에 배긴 풀냄새가 사라진 느낌에 괜히 서러워진다.
나도 라면 국물을 들이킨다.

Articles

5 6 7 8 9 10 11 12 13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