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차 창작콘테스트 시부문 응모

by 길에서 posted Jun 0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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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노인의 하루

 

비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을 와이퍼처럼 지워버리는 그는

때로는 호미처럼 웅크리고 앉아 노래를 흥얼거리고

어느 날은 하모니카 같은 옥수수를 들고 앉아

이 없는 입으로 추억을 하나하나 흘리며

이가 앙칼진 개를 불러들여 동무로 삼는다.

흘려진 추억을 주워 먹는 개의 이름은

철원이었다 금애로 바뀌기도 한다.

금애를 부를 때는 할머니가 흠칫 놀라 돌아보신다.

 

정작 비 오는 날이면 노인은 사람들이 그리워

비를 그대로 맞고 앉아 있는다.

철원이는 얌전히 개집에 들어앉아 물끄러미 노인을 바라본다.

비가 오는 날은 언제나 철원이로 불린다.

철원이를 부르지만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철원아 철원아 부르지만

녀석은 빗소리에 잠들었나 보다.

철원이가 부러워 노인도 빗속에서 호미 한 자루가 되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비가 그친 오후 말간 해가 비친다.

노인은 다시 와이퍼를 작동시킨다.

누가 지나가는지 누가 인사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철원이가 옆에 와도

금애 할머니가 옆에 와서 앉아도

무얼 보고 계신지 눈만 감았다 떴다 하신다.

저 말간 해처럼 자리를 지키는 노인의 얼굴이 평화롭다.

노인의 하루가 저물어 간다.

 

 

2. 모래알 유희

 

모래 속에서 발견한 작은 보석

손에 쥐고 있는데

물 손이 가져가 버린다.

 

보석같이 투명한 모래가

손안에서 좌르르 흘러

잡을 수 없는 꿈처럼

물속으로 흩어져 가고

 

그 작은 보석이 제일 예쁜

모래알 하나였다는 것을

나는 아직도 믿지 않는다.

 

모래성을 쌓고 구멍을 만들어

두꺼비를 부르면

물 손이 나타나 허물어 버린다.

 

여름날 문에 걸린 구슬발처럼

예쁜 모래알을 엮어서 발도 만들고

볕에 잘 말려 유리병에 넣으면

언제나 볼 수 있을 텐데

 

흘러간 세월처럼 잡히지 않는 모래알과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두꺼비 집이

아직도 생각나는 건

 

아직도 나는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흘러 보내고 허물어 보내도

모래알은 언제나 빛나는 보석으로

내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3. 압화

 

꽃길만 걸으세요. 꽃으로도 때리지 마세요.

꽃은 참 예쁜 말을 만든다. 좋은 의미를 만든다.

이름 모를 보라색 꽃에 반해 한 움큼 꺾어다

책갈피에 넣고, 꽃병에 꽂아 놓던 시절이 있었다.

 

꽃은 피어있을 때만 아름답다.

꽃길도 꽃이 활짝 피어있는 꽃길일 것이다.

미의 여신은 유화 속에만 존재하고, 빈 향수병은

시간의 입자를 흡입하는 가짜 여신의 모습으로 버려진다.

6월의 장미는 식어버린 커피처럼 쓸쓸하다.

여신의 이름을 빌린 화장품은 광고 속 여배우로 기억될 뿐.

찻잔에 띄운 마른 꽃송이가 과거의 영광을

뜨거운 물 위에서 신음하며 피워 낸다.

인간은 잔인하여 순간의 아름다움을 용케 수집하고

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꽃으로도 때리지 마세요.

꽃은 때리는 도구일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꽃이란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것.

돌아갈 수 없는 나의 청춘 시절이

책갈피 속 보라색 압화처럼 가슴을 짓누른다.

빙글빙글 날리는 코스모스 꽃처럼 바람에 나를 내맡기던 시절에

강물로 떨어지면 바다로 흘러갈 줄만 알았었다.

지는 해는 다시 떠오르지만 떨어진 꽃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예쁜 시절에

가장 예쁜 꽃을 따 책갈피 속에 간직하나 보다.

 

 

4. 김삿갓 허수아비

 

짙은 눈썹, 또랑또랑하게 큰 눈

큰 삿갓을 머리에 씌우고 단정히 누빈 긴 두루마리에

긴 장대를 손에 든 김삿갓 허수아비.

너른 들판을 마음껏 누비라고 세워 두었다.

 

사실은 커피잔을 쥐여 주고, 선글라스도 씌워 주고 싶었다.

긴 장발은 하나로 묶고, 삿갓은 줄에 매에 목에 걸고

두루마리 가슴에는 코사지도 달아 놓으면

썩 멋지지 않을까?

 

옛 선인을 가을 들판에서 만나는 일이란

얼마나 멋지고 환상적인 일인가.

제발 초라하고 기괴한 모습의 허수아비들

다 뽑아 치우고 해체하자!

 

사실은 내가 김삿갓을 만나고 싶은 것뿐이다.

못생기고 초라한 허수아비가 무슨 잘못이랴.

바람에 버둥거리고 새똥을 맞고 서 있는 그들이

자못 안쓰러워 초라하지 않을 그가 떠오른 것이다.

 

허수아비 디자이너라고 들어 보았는가?

나의 첫 작품이 김삿갓 허수아비이다.

초라한 허수아비가 싫어 멋들어지고

자꾸 보고 싶어지는 허수아비를 만들었다.

 

허수아비가 자꾸 보고 싶어 무슨 소용이냐고?

무엇이 어딘가에 세워진다는 것은 그곳이 어디인들

바라보는 이들에게 영감을 일으켜 주고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주기 마련이다.

 

초라한 허수아비를 보고 웃는 이들, 가엽게 여기는 이들이 있듯이

김삿갓 허수아비를 보고 방랑하다 여기까지 오셨구려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다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5. 도레미파솔라시도

 

도 랑 물결처럼 소곤대는

()입클로버 속 아이들.

미 풍이 불어오고

파 란 하늘, 파란 들판, 파란 웃음.

솔 나무에

()울거리는 웃음조각들.

시 계는 멈추어 있고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거미가 자아놓은 오선지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지런히 매달린다.



응모자 : 최인숙

이메일 : keanu27@hanmail.net

연락처 : 010-9340-4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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