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
계절이 하나밖에 없는 나라는 계절이 없고
그 나라로 가려면 내가 가진 시간 조금을 허공에 버려야 했다
버린 시간만큼 갈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양초는 자기가 묻힐 곳으로부터 자기를 태우면서
식물은 꽃잎을 손가락처럼 접으면서
알람은 깨워주기도 전에 강박적으로 움직이려고 하면서
짠 김은 방부제(DO NOT EAT)를 입에 물고 태어나면서
시간을 재는 것이다.
초침 같은 리듬을 심중에 지니고
일부로 시계 반대 방향으로 운동장을 도는
계속 도는 사람들
시계는 맨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각자의 시간으로 각자의 나라에서 살기 위해
서둘러 채비를 하자
각자의 그것에는 아무런 규칙도 없다
그것은 자꾸만 흘러가는데 나는 꾸역꾸역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이라 말할수록 ‘그것’은 선명해진다
강풍
나무며 구름이 되어
모든 (창)문을 열어둔다.
바람이 이렇게 불어서
나무가 쉬쉬 요동친다.
바람이 이렇게 부는데
구름은 꿈쩍도 안 한다.
그러나
나무인들 통째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며
구름인들 흐르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나무며 구름이 되어
바람 부는 길을 걸으련다.
오렌지 방 안에서
장을 보러 가는 길에
은행 앞 걸인과 은행 옆 걸인을 보았다
그중 하나는
세상의 휴면계정, 아무렇게나 엎드렸고
지팡이도 나란히 엎드렸다
또 그중 하나는
피아노 건반 같은 손으로 비파같이 쭈그려 앉아 얼후를 연주하고
찬바람이 빈 깡통으로 박자를 맞춰주었다
장을 보고 오는 길에
은행 앞 두 걸인이 동전 같은 귤을 까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장바구니에 오렌지 두 개를
한 곳에 모인 두 개의 깡통에 각각 넣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들숨의 오렌지 하나를
부직포처럼 뜯어서
동그란 방으로 썼다
보라색 시장
눈에는 심이 박혀 있어요.
눈알은 자꾸만 삑삑 소리를 내요.
감지도 뜨지도 못한 실눈이에요.
그대로 오늘은 보라색 시장에 왔습니다.
출구는 없습니다.
등가교환의 법칙은 있습니다.
돈은 소용없습니다.
에스컬레이터는 없습니다.
엘리베이터도 없습니다.
층이 없이 높이 쌓여 있거든요.
여기는 뭐든지 다 팔아요.
깔끔하게 진열해서 팔아요.
먹을 건 무엇이든 팔아요.
명품도 웬만한 건 팔아요.
우리가 느끼는 것도 팔아요.
느낌은
빛이 나는 색색깔 박스에
포장되어 있어요.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어요.
엄마는 이곳을 특히 주의하라고 했어요.
엄마를 잃어버린 적이 있거든요.
그때는 더 어렸을 때니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다행히 엄마의 목소리가 사방의 안내방송에서 들려왔어요.
“내가 좋아하는 색은 ‘그리움’이구나”
‘그리움’이라는 단어에서 에코는 계속되었어요.
그런데 오늘은 이곳에만 있을 거예요.
음식이나 물건들이 질려버린 건 아니에요.
다만, 눈이 아주 아프거든요.
대신, 엄마가 조심하라고 했으니까 그렇게는 할게요.
처음에는 형광, 길고, 빨간색, 바다파란색 동그란 것이 박혀있는 느낌을 보았어요.
옆쪽에는 녹물을 뒤집어쓴 데다 해야 할 빨래를 다 섞어놓은 덩어리의 느낌도 있었어요.
무엇을 사야 할까요? 끝까지 신중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고민할 필요까지 없었습니다.
뚫어져라
보다 보니 둘이 하나가 되었거든요.
그곳의 모든 상자를 안아 들고 눈을 바로 떴습니다.
포장을 다 뜯었을 때 그 속의 기억이 아침 햇살과
같이 펼쳐집니다.
눈물 덕분에 눈이 많이 나았어요.
매일 밤
실눈의 흑색 길을 따라
보라색 시장에 갑니다.
피와 해파리
피는 슬피 온몸을 흘러요.
피는 서글피 푸념해요.
‘P’에는 눈물이 고여 있어요.
‘피읖’ 입 모양으로 피식 울어요.
슬픔은 가슴에서 울컥 쏟아지고
거의 동시에 가장자리 아주 가는 곳까지 닿습니다.
피죽도 못 먹은 몸이 돼서야
피가 젤리가 되고 나서야
슬픔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하, 해파리가 아니면 이제 태어나지 않을게요.
하얀 해파리가 파란색이 되어 하늘하늘 휘젓고 다니는
바다만 좋습니다.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하’하고 길-게 뱉는 것을 질투한
피읖이 결국 ‘피읖’같이 생긴 상자 안에 해파리을 가두고 구경하는
아쿠아리움은 절대 가지 않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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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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