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회 창작콘테스트 시 부문 응모

by 구거궁문꽈 posted Jun 1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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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이


하루를 내 손으로 고스란히 버려두고 집으로 돌아와 펜을 잡는다.

펜촉의 잉크는 오랜 기다림 끝에 종이위에 안착한다.

종이가 잉크무게만큼 무거워진다.

버려져 뉘엿뉘엿 죽어가는 하루는 끝내 가벼워졌다.

집으로 들어오며 봤던 지붕위에 걸려있던 흐린 달이 마음 한 구석에 걸린다

내일을 쓰는 법을 잊어버려 사실 종이는 무엇 하나 채워지지 않았다.

오늘 하루의 부고는 숫자를 통해 내 눈으로 흘러들어온다.

하루처럼 가벼운 종이 위를 떠다니는 손에는 죽어간 오늘의 피가 묻어있다.

펜 속 잉크는 그 피로 만들어진 모양이다.


토성의 고리

 

토성의 고리를 본 일이 있다. 우주를 배경삼아 묘한 색으로 빛이 난다. 더럽게 고여 있는 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의 비늘 같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우주의 오래된 먼지들이었다. 토성의 중력에 두 발이 묶여 오도 가도 못하는 우주의 티끌들. 별 볼일 없는 돌덩이 돌덩이들이 모이면 이렇게 아름다운 고리가 된다. -라고 생각하니 뭔가 멋쩍다.

 

서울의 야경을 본 일이 있다. 강에 비쳐 아래 위 두 겹으로 보이는 다리. 붉은 빛을 토하며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들. 시간도 잊어버린 채 대낮처럼 환한 창문이 많은 현대식 건물들. 어릴 적 놀이터에서 함께 몸에 먼지를 묻혀가며 놀던 친구는 어느새 수염에 정장에 넥타이에- 저 서울 야경의 한 조각이 되었다고. 평범한 사람 사람들이 모여 이렇게 멋진 서울의 야경이 된다. -라고 생각하니 어딘가 답답해져왔다.


문제의 저녁

 

문제: 문자들과의 씨름 후 밖으로 나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하늘의 짙은 남색은 내 얼굴에 닿을 듯 내려앉아 있고, 주머니엔 오천이백원이 질서 없이 빙글빙글 손을 만진다. 다음 중 저녁으로 먹을 음식으로 가장 적당한 것을 고르시오.

 

초밥. 회전초밥 집에서 두 접시정도는 먹을 수 있다.

새우초밥과 계란초밥정도가 적당한 것으로 보인다.

라면과 김밥. 그나마 포만감이 느껴질 조합이다.

맛은 있겠지만 테이블위에서의 비참한 기분을 떨치기 어렵다.

치킨. 길거리에서 파는 전기구이 통닭.

계란초밥의 어머니일 수도 있겠다. 두 마리는 더 싸지만 돈이 부족하다.

순댓국. 내용물도 다양하므로 가장 식사의 느낌이 든다.

맛은 그리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햄버거. 명상을 하고 싶지만 맛으로 치면 최고의 선택.

하지만 단품으로 주문하면 목이 메어 죽을 수도 있다.

 

머릿속에는 생각대신 음식들이 헐떡인다.

주머니 속 동전들은 여전히 아우성이다. 나는

그만 두었다.

시선을 회색 아스팔트길로 옮긴다.


푸른 벽

 

벽에 걸린 파란 사람

벽에 꽃이 피어있다.

몇 송이

 

꺾어다 그 사람위에

아니면 벽 위에 아니

대체 나는 무슨 짓을

 

책이 몇 권 우두커니 서있다.

뒤에는 벽만한 창문 아니면 벽

책들은 조용하다. 그래도

벽에는 꽃 몇 송이

 

꺾어다 책 위에

아니면 벽 위에

심었다. 나를

 

피우기까지는 시간이 든다.



우산의 미래

 

그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그날은 하루 종일 비가

안 왔던 것 같기도 하고

 

창문을 열면 흙냄새가 걸어 다닌다.

사람들은 빗줄기에 녹아

없어질 듯 하고

 

우산을 또 잃어버렸어요.

 

검은색으로 변해가는 나와 인사한다.

구름이 먼저 검은색이

된 것 같기도 하고

방안에 구름이 눕는다.

 

방 한 켠 보들레르는 물 컵을 들고

나에게 묻는다.

우산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양떼구름

 

어쩌면 꿈이 아닐지도 모르는 꿈속에서 나는 양떼를 몰았다. 어쩌면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나는 어떻게 웁니까. 메에메에 하고 울었다. 이건 양이 내는 소리다. 양 한 마리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자 주위를 맴돌던 늑대는 가슴에 십자가를 그리며 양의 배를 갈랐다. 양의 죽음에 늑대는 까무라치게 놀랐지만 다른 양들은 놀라지 않았다. 늑대는 어떻게 웁니까. 메에메에 하고 운다. 이건 내가 우는 소리다. 푸른 하늘에도 하얀 양들이 떠다닌다. 빨간 잔디밭 위에서 늑대는 하늘에 올라간 양들을 바라본다. 구름은 어떻게 웁니까. 하염없이 메에메에 하고 웁니다

 


김영호

kyho4849@naver.com

01055354849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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