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

by 김형식 posted Dec 0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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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1

- 3호선

 

올해 겨울은 두터운 외투를 장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버스에서 버스로 열차에서 열차로 건물에서 건물로

나는 방에서 방으로만 운반되는군요

히터들은 종일 따뜻합니다

저 많은 입김들은 모두 어디서 오는 걸까요

열차의 흔들림에 대하여 꼿꼿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도 나를 그렇게 흔들어 가는 중이겠지요

나는 얼마나 가볍습니까 얼마나 나약합니까 악합니까

왜 이름도 모르는 이들과 마주 앉아야 하는 형태로 열차는 설계되어 있습니까

눈을 감은 저 몇몇 중엔 분명 기도를 읊조리는 사람이 있다고 믿습니다

노인은 오래 데워 둔 자리를 내주고 떠납니다

몇 장의 온기가 방석처럼 쌓여 있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이곳에서 일어나야만 하겠지요

한 줌 체온만을 남겨둔 채

우린 곧 기체처럼 흩어질 거에요

내일 다시 마주치더라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

 

 

 

시간 5

- 숲의 감정

 

귀가하는 어깨들로 열차는 붐빕니다

텅 빈 천장만이 여유로워요

꼼짝없이 뻣뻣해지는 나는 나무의 자세를 배워갑니다

모두 한편으로 기울며 견디며 우린 비로소 하나의 숲처럼 흔들리는군요

이곳에선 아무도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북적이는 고요,

사람들은 이렇게나 많은데 다들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홀로 돌아가는 중인가 봐요

이럴 때 혼자라는 말은 곧잘 다정해지고

차창마다 일렁이는 생소한 얼굴들이 살갑습니다

이곳의 일곱 개 좌석은 다른 곳보다 바람의 영향이 적고 온도가 2°C 높은 자리입니다

저 한 문장을 옮기려고 안내문은 좀처럼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검은 차창 너머에도 덥고 연한 지대가 있다고 믿습니다

양 떼처럼 순한 사람들이 열차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시간 3

- 광장

 

당신의 등을 따라갑니다

더듬더듬 계단을 오르는 당신

나는 언제쯤 당신의 속도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지상에는 빛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역사를 빠져나오자 비둘기 떼가 일시에 날아오릅니다

통화를 하며 가는 이국의 여자

나는 그녀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이럴 땐 J, 우리가 같은 모국어를 가지고 있다는 게 더욱 정답습니다

웅덩이마다 강수량을 측량하던 흔적들

계절을 관찰하는 나무의 생계는 저토록 아름다운 색을 키우게 하는 걸까요

광장에는 사람들이 양 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우린 어쩌다 이곳에 모이게 된 걸까요

네모난 가방에 네모난 코트를 걸친 네모난 표정의 사람들

끊임없는 대열에 떠밀려 걷는 아침

이 도시는 지나가는 바람보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더 차갑습니다

 

 

 

시간 4

- 골목의 밤

 

골목엔 나지막한 지붕들이 늘어서 있고

창문마다 입김처럼 흐린 불빛을 드리운 저녁

마주선 두 담장이 서로를 간절히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J, 우리 사이에도 벌써 몇 개의 계절이 마땅한 이름도 없이 지나갔군요

문간마다 내몰린 어린 화초들에 마음이 물렁해지는 무렵

오래 돌보지 못한 동창 하나가 이곳 어디쯤

홀로 저녁을 미루고 있을 것만 같은 골목입니다

차가워진 외투를 여미며 귀가하는 걸음들

돌아가는 뒷모습마다 겨울을 업고 있군요

불어나는 밤과 불어오는 바람과 끊임없이 밀려드는 이 골목을

다 견디면 다 견디고 나면

밤하늘에 별빛이 켜지듯 하나 둘

어두운 마을마다

당신의 순한 눈동자 같은 불빛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시간 7

- 숲이 자라는 방

 

이불 위로 쏟아지는 달빛이 무겁습니다

창밖에는 잠 못 드는 마음이 많고

나는 방을 견디는 사람입니다

무서운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요

왜 당신은 촛대를 끄십니까

당신이 버린 숲속에서 나는 길을 잃었습니다

벽지마다 낯선 그림자가 자라나요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이교도가 되고

자주 당신의 이름을 혼동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여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시여

숲속에선 자꾸만 양들이 죽습니다

어서 당신의 양을 치소서

먼 곳으로

더 먼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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