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
좋아하는 색들을 짜두었을 뿐인데
어느샌가 섞여 원치 않는 색이 되었다
얼굴을 찌푸리며 닦을 의미조차 못 찾다가
그대로 놔둔 채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의식없이 무심코 팔레트를 보다 깨닫다
단지 어색함에 거부했나봐, 금이 간 내 외골수의 벽.
홀로 찾은 새로움에 오묘한 뭉클함이 주체못할 듯 차올라
순간 모든 수분이 바닥날 듯 쏟아내버렸다
시선
따갑다, 마치 바늘로 꼭 꼭 찔린듯
따뜻하다, 온 세상의 빛이 내게로만 향하여 안긴듯
단 한 명의 아주 작은 눈동자 두 개가
내가 구축한 세계의 질서를 갉아먹은 뒤 힐난의 깃대를 꽂는다
또는 더럽게 널부러진 생각의 조각을 대신 주운 뒤 갈피를 잡도록 돕는다
나는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무력하거나 활력을 찾는다
가로등
귀가하는 밤마다 가로등은 일정 간격으로 줄지어 빛났네
무의미한 일상, 당연하다 느낀 가로등의 존재를 그 날 알았지
꽤 멀리 있는 가로등을 빛의 번짐까지 살펴가며 집중한 채 걸어갔네
두 눈은 젖어갔고 입은 한껏 벌려 웃었는데 그 이유는 말이지
가로등 빛에 빨려 들어가 존재 자체가 팟 하고 흩뿌려짐이 상상되었네
마치 너무 현실같아 오르가즘마냥 울며 동시에 웃었단 말이지
흩뿌려져 순간 흔적없이 사라져, 나를 아는 모든 존재들은 나를 모르네
먼저 주검이 된 친구의 얼굴이 보여 아, 그녀를 잊고 있었어 나도 마찬가지겠지
가로등은 일정하게 반복되잖아, 직진하는 그 도로에서 감정은 뫼비우스의 띠였네
두 눈은 젖어갔고 입은 한껏 벌려 웃었는데 그 이유는 말이지
빛에 가까워질수록 존재 자체가 팟 하고 흩뿌려짐에 난생처음 자유를 느꼈네
마치 너무 현실같아 오르가즘마냥 울며 동시에 웃었단 말이지
불면증
오늘도 역시 녀석은 안 오지 미리 데워놓을 걸 이부자리
새벽의 시계추는 어찌나 느린지 초침의 소리는 마치 가시
수확 없는 침대 귀퉁이에 누워 양을 세었어 몇 천마리
언제가되야 마음 비우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함께 걷던 인연들을 향한 미움, 식은 땀에 애초에 없는 듯한 지문
어디 높은 곳에서 떨어져 볼까 하다 뒷걸음질 쳐지는 몸뚱아리
자책과 자괴감이 섞여 손이 떨려 헛구역질에 울령거려
'내일은 새로운 태양이 뜰거야' 진부한 영화 대사 되뇌여
분주한 아침의 밝음은 내면의 어둠을 더 짙게 해
출근길의 지하철은 내게 군중 속의 고독을 곱씹게 해
이끌림
억울하지, 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온통 너로 들어차 있는 내 눈을 보며 황당해 하네
음, 애초에 관계에 답은 없다지만 너 따위가 뭐길래
내 신경 전체를 이리 집어 삼키도록 놔두었을까
억울하네, 네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는데
스스로 내 눈 앞을 맴돈 것 알아 혼란스러워 당황도 했네
음, 관계를 한 단어로 도출해낼 수 없다지만 너 따위가 뭐길래
당최 무엇이 내 너를 자연스레 보듬어 포옹하도록 이끌었을까
아마 태초에 '네게 나는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추었나봐'
불현듯 용기내어 내달리다보니 네 눈 안에서도 내가 보였네.
이름: 김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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