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곁에 있어주길 바라면 안 될까
오늘같이 무겁고 외로운 밤이 짓누르고 있을 때
무릎을 빌려주고 담요를 덮어줄 수 있는 사람이
내 눈이 온전히 감겨 편히 이 밤을 보낼 수 있도록
그것이 꼬박 밤을 새야하는 일이라도 견뎌줄 사람이
손가락을 들어 밤하늘의 별을 하나 둘 셈하다가
우연히 두 손가락이 닿아 얼굴이 발개질 사람이
나에게 그런 사람이 너이길 바라면 안 될까
「나는 가을이 되면 잠시 눈을 감는다」
매년, 밤의 찬 공기는 내게 가을임을 알리고,
나는 가을이 되면 잠시 눈을 감는다
눈을 감고 모든 것을 지운다
그 까만 배경에 너를 그린다
처음 만났을 때의 너를 그린다
너의 얼굴 너의 표정
너의 옷가지 너의 손인사
다행이 아직 난 너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자 너의 향기가 나기 시작한다
머리카락 바람에 날리는 향기
품안에 안기는 따뜻한 향기
조금 서툴렀던 우리 사랑의 향기가 나기 시작한다
눈을 뜨면 네가 내 품 안일 것만 같다
하지만, 여기서 눈을 떠버리면
너는 다시 어두운 어딘가로 사라져
너를 점점 떠올리기 힘들 것만 같다
이대로 널 보고, 널 느끼고 있으니
꼭 감은 두 눈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살며시 눈물을 내리운다
그래, 이렇게 아직 난 너와 함께 있는 것이다
아직 나는 너와 이별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비록 우린 다시 만나기 어렵겠지만
다만 난 이렇게 너를 만나곤 한다
그 때 말 못한 이야기를 전하곤 한다
-가을이다, 부디 잘 지내라.
「늘 내 마음에는 별이 핀다」
널 바래다주고 돌아가는 하늘에는
늘 별 두 개가 떠있었다
하나는 나의 별 하나는 너의 별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늘 내 마음에 별이 하나 핀다
가장 밝고 외롭고 그립게 빛나서
일부로 무엇인지 생각지 않아도
그게 너인 걸 느낄 수 있다
네 옆에 희미하게 별 하나가 더 있지 않을까
몇 번을 찾아봐도 나의 별은 이제 없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우리인적이 없이 남이 되었다
단연코 두 별은 하나가 될 수 없었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어찌 이렇게 가볍고도 무거운지
별 하나의 무게가 어찌 이렇게 아름답고 슬픈지
「향기」
1
서점에 들러 책 향기 맡으려하니
너의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공원에 앉아 잠시 눈을 감으니
너의 온기가 느껴졌다
돌아가는 동네 골목에도
묘연하게 비추는 가로등에도
이 편지에도, 내 마음에도
온통 너로 가득하다
너 없이 만들어 놓은 나의 일상에
너는 그 짧은 순간동안 은연히 스며들었다
2
빠르게 타오르는 불꽃은 빠르게 식어가고
은연히 스며들은 너는 은연중에 빠져간다
그 동안 내 옷가지에 스며들은
너와 나눈 향기가 점점 빠져나가
내 이 작은 두 손으로 허둥지둥 막아보다
결국, 울음이 터져 주저앉고 말았다
다시는 맡을 수 없는 그 향기가 잊히기 시작했다
기억하려고, 잊지 않으려고
사람들이 가장 많은 거리로 나가 네 향기를 찾기로 했다.
울먹이며 이리저리 뛰어다녀보아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네 향기 하나 찾기 어려운데
우리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사랑했을까
사랑하는 너의 향기는 마음에 남아 찾을 수 없다
마음속에 남은 향기는 맡을 수 없이 코끝이 시리다
「우리에게 사랑이란」
저녁 여덟시
너에게 식사라도 한 끼 사주기 위해
너에게 변변치 못한 선물이라도 하기 위해
나는 일터로 나간다
가진 것이라고는
건강한 몸밖에 없어
물건 나르는 일 밖에 할 수 없었다
이리저리
물건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눈물 섞인 제육덮밥을 먹고 나서
다시 어두운 작업장에 들어간다
새벽 여섯시
어엿한 직장인들이 부지런한 학생들이
직장을 향하고 학교를 향할 때
교통비를 아끼려 자전거에 오른다
아침 아홉시
네가 일어날 시간
내겐 잠에 들 시간
오후 한시
일어나지 못한 나를
너는 하염없이 기다리다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너에게 가난했다
너에게 나는 게을렀다
그것이 네가 날 떠난 이유였고
우리가 헤어진 까닭이었다
너에게 사랑이란
약속시간에 늦지 않는 부지런함이었고
나에게 사랑이란
무어라도 해주는 헌신이었으니
너도 나도
우린 결코 서로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