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회 창작콘테스트 시 부분 공모 - 가시(可視) 외 4편

by 장송곡 posted Dec 2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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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可視)

따가운 태양 밑에서도 서늘한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계절은 매년 찾아왔고, 같은 때의 기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계절을 사랑했습니다. 
낮에는 앙금처럼 남은 온기 속에 손을 잡은 우리가 자유롭게 뛰어놀았고,
무관심에 서늘한 밤에는 아직 정리하지 못한 얇은 이불 하나를 나눠 덮고 온기를 나눴습니다. 
그때는 잘못인지도 모르고 그 많은 선악과를 맛봤습니다.

참 많이도 분했습니다.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면서
자신의 이상에 서로를 빗대어 보는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엇나간 시선은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도 서로의 꽃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자주 그 흔한 절기(節氣)가 눈에 밟혔습니다.
가축처럼 지내온 시간에선 불편함을 안전함이라 생각했고,
나쁜 기억들은 악몽처럼 일상 속에 잊혀졌습니다. 
하루 잘 공간은 숱하게 빌려 왔지만 목놓아 울 공간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런 나날들은
신기하게도 매년 찾아왔습니다.











딜레마

저는 자주 마지막을 입에 올렸고
애인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것에 모종의 자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저에게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극한의 것들보다도 저는
좀 더 느슨한 것들이 두려웠습니다.
조용히 식는 내일보다 달아오르는 오늘이 두려워서,
그 두려움에 올라간 입꼬리에 확신 없는 미래를 담았습니다.

거짓은 항상 진실의 뒤꿈치를 밟았습니다.
그것은 자주 들키는 얕은 것이거나
우둔한 다람쥐처럼 숨긴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깨달음은 언제나 숲처럼 불어난 책임 이후에 찾아왔습니다.

때때로 저는 젖은 눈길을 피해 한 손짜리 노트로 도망갔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의도치 않은 탄생으로 서두를 적었고
자유로운 죽음으로 성경의 문장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도피로써 제 허물은 만인들의 청지기였습니다.










거미

가을부터 겨울까지 너는 
바람구멍조차 막지 못하는 집에서 
한 톨짜리 불꽃들을 쓸어 모았다

눈인사로 시작하는 건조한 하루에서 
바늘같이 얇은 여덟 개의 손가락에
나는 가끔 가난한 관심을 끼워 주기도 했다 

태어나기도 전에 어미를 잃는 
가련한 새끼 이야기를 눈짓으로 하다가 
너는 겉 없이 속으로 흐느껴
눈물로 스웨터를 짜기 시작했다.

어느덧 새벽은 이슬 대신 서리를 품어냈고, 
겨울의 칼바람에 베어 나간 그 거치적거리는 삶에서 
그래, 삶의 눈물이 그 많은 눈에서 흘렀다.










망향

전공 책 맨 뒤 페이지 여백은 서정의 낙서로 불법 점거 중입니다. 
강렬한 여름이, 몇 주의 짧은 봄을 서투른 낭만이란 이름으로 덧쓸 때
진실의 무게를 피해 달아난 이들은 자연스레 한곳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달이 밝은 날에는 그것만으로 그림자가 생긴다던가
검게만 느껴지는 밤하늘은 사실 짙은 파란색이라던가
핸드폰 카메라로도 충분히 별을 찍을 수 있다는 둥 쓸모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고향은 도피와 상경을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목소리 한번 듣기 어렵다는 점도 쌍둥이처럼 닮았습니다.
피신의 나날은 빨리 달리는 이의 죽음을 빌고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이 오면, 꿈처럼 눈꺼풀 속을 개근하였습니다.










관성

26도로 고정된 냉방과 평일 오전의 한가함에서 어렵지 않게 찾겠지. 
어떤 고함으로도 이름을 부를 수 있어. 그래도 어른이 되고 나선 부를 일이 없었지. 
끝이 말라붙은 나뭇가지와 키가 작은 사람. 모두 예외 없이 꺾이고 거리는 어느새 
비워져있지. 딱한 사람. 그 유체를 바닥에 펴 바르고 나서야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을 찾지. 
이름. 한평생 묶여있어도 그 이름을 물어본 사람은 없었지. 
자주 어두웠고 때때로 가쁘게 숨을 쉬었지.

시퍼런 어둠 속에서 저 희끗한 형태가 아카시아인지 나는 알 수 없어. 
그래도 그 많은 가지들. 그 가지에 역병처럼 퍼진 가시도 나는 보이지 않지만, 
어차피 어두운 관계에선 옷에 적힌 글자가 서로의 모든 것이니까. 
그래도 그 향기. 향기. 낙인 같은 그 향기가. 코를 박고 맡을 때는 모르는 
그 연인 같은 것은 속일 수 없어. 항상 그 시퍼런 것 속에서 이쪽을 보고 있어. 
아니, 어쩌면 태연하게 속일 수 있는. 그런 감기 걸린 사람을 찾고 있겠지. 
영악하지. 오르막 뒤에 숨은 내리막처럼. 태양이 저문 오르막은. 
그 가파른 오르막은. 하얗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나를 덮쳐도 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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