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회 창작콘테스트 시 부문 공모 <책망과 반성과 회한과 고통의 끝에서 심호흡을 하세요 외 4편>

by 최로빈 posted Mar 2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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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망과 반성과 회한과 고통의 끝에서 심호흡을 하세요

숨과 숨 사이에 아주 잠깐 호흡이 멈추는 순간

몰아치던 생각도 함께 멈췄다

이따금 숨을 멈추고 있을 때가 있다

기어코 생각의 끝을 보고자 할 때

숨도, 생각도, 답도 멈춰

무간의 입구에서 서성인다

문득 심호흡을 하기로 했다

얼마만에 들이쉰 숨이었나 

얼마만에 내뱉은 숨이었나

번뇌와 고통은 고이지 않음으로 해방된다


수많은 시간은 

상념이 되어 

온몸을 휘감지만 


모든 것은 들숨과 날숨 세 번으로

지나치는 바람이 된다



  

눈에 담은 널 현상하는 법



풍경에 너를 세우고 

포즈를 요청하고 

셔터를 눌렀다 


네가 없는 건 알지만 

여전히 네가 있던 자리에 가서 

너에게 포즈를 요청하고 

셔터를 누른다 


마른날에 빗물이 렌즈를 가린다



터무니없는 두려움은 그리움을 이기지 못했다


   캔버스에 검정색 물감으로만 너를 그렸다 아무에게도 그림의 네가 너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깊고 짙은 눈도 검정색으로만 앙증맞은 콧날도 검정색으로만 앵두를 품은 입술도 검정색으로만 그려 넣었다 제법 농담이 가득한 온통 검은 그림은 이상하게도 기억 속 너와는 다르게 느껴져 고심에 이르렀다 아무래도 부족하여 강물에 채를 넣어 사금을 채취했다 사금 한 줌을 손에 쥐어 그림에 흩뿌리고 나서야 네가 보이기 시작한다 불을 끄고 그림 앞에 라벤더 향초를 켜니 불빛에 사금이 반짝인다 나는 비로소 그것이 너와 마주한 밤하늘이라는 것을 깨닫고서 창문을 열고 하늘을 봤다 그렇다 나는 매일 밤 너를 그리워하지만 너를 닮은 밤하늘을 보다가 울어버릴까 봐 밤에는 안대를 썼다 터무니없는 두려움은 결국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밤하늘을 핑계로 너를 그렸다




나만 아플 수 없어 비웃음을 내다 팔았다


어렴풋한 기억에 사로잡혀 있을 때

나에 대한 뜬소문이 발목을 붙잡았다

확실하지 않은 기억에 속죄를 구하다가

문득 기억을 해방할 열쇠의 부재를 깨달았다

사랑을 갈구하던 자는 결국 미워할 자를 찾고

미움을 갈구하던 자는 결국 사랑할 자를 찾는다던데


거짓말

기어코 던져진 칼날을 피하려다가

포기하고 이마를 내어줬다 

이마에 꽂힌 칼날은 할로윈 분장처럼

광장에서 비웃음을 샀다 

  

나는 그렇게 장사를 시작했다 

  

내일을 살지 못한 자는

과거를 갖지 못한 억울함으로 현재를 가졌다 

그리고 외로움으로 외로움을 사다가 축배를 들었다

누구보다 처연해 얻은 숭고한 감투는

삶을 이을 중요한 열쇠가 되어

타자의 행복을 잠그고 

장사로 얻은 비웃음을 팔았다


여전히 부치지 않을 서신


  한 많은 여인의 곡소리처럼 창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는 서글펐다 숱한 기억들이 떠돌다가 콧잔등에 머무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으로부터 해가 뜨기까지 선잠으로 각성한다 나는 그때마다 당신에게 부치지 않을 서신을 작성한다 귀뚜라미가 신호를 보내면 나는 당신의 부름을 알아채지만 나는 애써 외면하려 한다 더 이상 나는 당신의 부름에 응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이별을 고할 서신에 마침표를 찍고 나면 고요히 잠이 든다 고요하게도 창을 지나 햇살이 스민다 






이름 : 최로빈
메일 : robii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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