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無題
아만
닫은 창문 위로 흔들리는 그림자가
마치 내 이상향을 가리키는듯하여
창문을 열었다가, 닫아본다
입을 열어야만 선명해지는 목소리가
원망스러웠던 까닭은 입술에게 있는 걸까
한 번은, 닫으려면 손목을 움켜쥐고
밝은 빛 그림자가 아닌, 희미한 빛줄기를 즐기며
열지 않을 입술에 립밤을 바르던 내 혀에게
목소리의 상실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고른 말
목젖에 손가락이 닿게
말을 고른다
한 땀 한 땀 너의 호수를 지나갈 말들을
고르고 골라서
반대편 하늘에 수놓아서
물결에 비추어 본다
내 속에서 끄집어낸 별들을
고르고 골라서
혜성이 되기를
별똥별이 되기를
한 줄의 감동이 되기를
심장으로 빚어내어
손끝으로 다듬어낸 섬광들이
하늘에도,
마음에도,
네 호수에도 반짝인다
검댕
왜 검댕은 묻고 마는 것일까
스스로만 검어 세상을 밝혀주기는 싫은가 보다
왜 검댕은 언제나 생겨나는 것인가
맑은 공기도 검댕이 좋은가 보다
어찌하여 반짝이는 별에만 검댕이 생기는가
혼자 반짝이기에는 검댕인 너무 외로워 보이는 걸까
너도 묻고 나도 묻고
너도 가고 나도 가고
검댕의 증오가
세상을 검게 물들여 간다
빈 컵
요즘 들어 그렇다
독기가 차오르다 못해
꽉 찬 독주를 마셔야 할 때가 있다
아지랑이처럼 불타오를 때면
고요한 밤하늘로 식혀주자
거뭇거뭇하게 채워져 나갈 때면
새하얀 숨결로 비워내 보자
눈을 감아보라
아련한 추억과
한 줌의 미소와
두루뭉술한 구름이
빈 컵에 차오른다
야행성
발 못 내딛는 한밤중에
빛나는 네모난 화면을 보고 있으면,
오방색이 시선을 타고 나를 어지럽힌다
만음이 나를 춤추게 한다
부끄러울 만큼 밝은 한낮에는 그렇게도 어려운데,
다른 사람의 오방색이 그렇게도 힘겨운데,
생쥐 하나 들을까 봐 무서워서,
혼자라도 꽌 찬 척 하고픈 그믐달이라서,
나는 오늘도 잔잔한 소음이 되어
온 방안을 어둡게 밝힌다
손유신- tlsdb78945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