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밟힌 서리가 사르르 눈물을 흘리니
신발을 넘어 메아리로 스미네
판 공기와 시린 품이
눈을 가려 여린 눈망울 보지 못한
어느 몽상가의 자만
서리의 수정은 녹아내려
선명한 자국을 남기네
눈이 먼 몽상가는 이미 감각이 없네
그는 다시 한 번 더
서리는 다시 한 번 더
잘못 한 건 누구
시상
볼펜이 나오지 않아 애꿎게 흔든다
펜 속의 잉크가 나를 흘기지만
나는 대답이 생각나지 않는다
틀의 끝자락에 앉아있는 지금까지도
새하얀 종이는 텅 빈 채 기다리는 듯 하지만
나는 죄스러워도 고해조차 뱉지 못 한다
수시간 뒤에도 그 자리에서 기다릴 종이지만
눈을 흘겨도 내게 욕할 수 없는 잉크지만
쥐어줄 말도 내어줄 자리도 부족한
몇 시간의 마지막 하루가
내게는 그 무엇보다 보내기 힘들었던
연인의 온기처럼 죄여온다
여수의 밤
돌산 위에 내리니
어느새 찬바람이 어둠을 몰고 왔네
저녁파티에 늦은 나의 뮤즈가 한 귀걸이처럼
저물기 전 태양은 별빛을 내려앉혀
내 가슴에 안기네
나무에 열린 별빛을 따서 한 입 베어무니
차가운 냉기가 반짝이며 입 안을 한 가득
다시 돌아가는 길 위에 소복히 쌓이네
춘분
매화가지에 앉았던 눈꽃은
부드러운 새살이 돋아나
이젠 녹아재리지 않네
산수유가지에 앉았떤 눈꽃은
황금빛 햇살에 익어
이젠 따스히 빛나내
마치 껍데기를 버린 나비처럼
떠오른 봄
흰구름 사라진 자리에 돋아난 별들은
서늘하고 뾰족한 밤하늘 사이사이를
물들이는 물방울들
밤이 물러가지 않도록
멈춰선 경계가 유난히 반짝거리는
순수한 우화
알아도 모르고
봐도 본 적 없고
들어도 낯선
별과 밤의 노래
저물어 가는 석양빛이
실어 보낸 실크에 적힌 가사가
더 부드러웠던 하루 끝의 숨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