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에 대한 고찰
지금이 봄이라면 난 당신을 봄이라 부르겠소
그대가 지나온 자리엔 무른 땅에도 뿌리가 있어
난 매번 꽃으로 그리운 이름을 새겼지요
작은 집에도 꽃향기 반갑게 불어와
봄은 자주 보랏빛이 된 걸 아시나요
그대의 미소처럼 그 해 봄은 환하게 피었다오
여름이 온다면 난 당신이 지나온 자리를
여름이라 부르겠소
마음이 여린 그대가 흘린 눈물은
누군가에겐 깊은 바다일 거라고
긴 시간 당신의 바다에 돛단배를 띄워 보내겠소
나는 섬이 되어 그 아픔으로도 바다를 만들거요
푸르기보다 더 깊은 당신이 있어
나의 여름은 가장 뜨겁고 아팠다오
가을이 스며들면 난 당신을 가을이라 부르겠소
낙엽 떨어지는 소리에도
온 거리에 그대의 고운 웃음이 붉게 번져
쓸쓸한 저녁에도 입맞춤하듯
난 이 거리를 오래도록 걸었지요
흔들려도 묵묵히 서 귀갓길을 밝혀주던 당신
당신이 있어 나는 붉은 나날에도
수없이 오르내릴 수 있었다오
겨울이 오면 난 당신의 눈이 되겠소
수많은 발자국이 살아가는 곳
당신은 하얗게 지워질 준비를 하지만
나는 추위를 많이 타는 당신이
이 겨울을 온전히 견뎌낼 수 있게
함박눈이 쏟아지는 밤에도
수없이 당신의 얼굴을 그리겠소
뷰티풀 라이프
꽃잎이 가득한 창가자리에 앉아본 적 있나
파리의 감성을 간직한 이태원의 빵 집에서
세 노파가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본 적 있나
바람 타고 지나온 낙엽들이 하늘 높이
긴 서사를 만들 때
등 뒤에서 오래도록 지붕을 만들던 기억이 있나
걸음이 묻은 자리에는 누군가의 향기가 있어
온도가 그리운 날이면
나는 커피 한 잔에 어느 인생을 사곤 했다
머물던 자리 곳곳 떨어진 에피소드에도
돋보기안경을 끼고 바라본 풍경들에도
새처럼 재잘거리던 순간들이 부풀었다
흘려둔 말들이 책갈피가 된 걸까
계절의 빈자리엔 늘
잘 지냈소? 힘없는 목소리가 묵직하게 도장을 찍었다
나무 아래서 한 해 쉬어가는 밤이면
어디서 불꽃을 본 걸까
노파들은 창문 앞에 모여 앉아
묻어 둔 계절에 대해 떠들었다
발걸음이 느릴수록 자주 안부 인사를 건넸다
떠나보낸 임의 목소리가 우물을 만들고
같은 바람 아래 쓰다듬던 머리칼로 집을 짓고
혀 끝 아래 감아둔 시간을 나뭇잎에 새겼다
사라진 것들은 주머니 안에서도 한 줌 이었다
의미 없이 밤을 오르던 날에도
여든의 생은 페이지마다 머물렀을 거야
창문 가득 주름진 선들이 입김을 남겼다
오순도순 힘없이 활기찬 그들의 대화가
찻잔 아래서도 꽃을 피웠다
감기
엄마의 기억은 여전히 십 년 전에 머물러 있어요
내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 게
여전히 어릴 적 품처럼 아늑한데
그 사이 처마 밑 고드름도 내 키만큼 훌쩍 자랐어요
처방전 없는 나날이 계속된 걸까요
우리가족은 매일 계단을 오르며
이웃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밀봉 했고요
엄마는 긴 강에 한 조각 기억을 띄워 보냈지요
높이 올라갈수록 구름은 멀리 떠내려갔어요
기침은 더욱 심해졌고요
엄마는 여전히 흩어진 말들로 내 이름을 대신했지요
매년 찾아오던 감기가 유독 길었던 날
목구멍 안에서 집을 짓던 말들
가족사진 속 세상은 봄인데
우리는 긴 시간 겨울을 앓았어요
바쁜 나날에 처방을 잊은 밤이면
마음에도 촛불을 켜 두었고요
아무 말 없이 샘처럼 눈물을 흘리던 그녀
버려지는 게 두려운 나무는
온 생으로 기억의 조각을 맞췄어요
낙엽 한 장 흘리며 입 안 가득 간직한 그 이름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밤에도
활자들은 엄마의 눈 안에서 별자리를 만들었어요
어둠 속에서 더 빛이 나는 당신
눈꽃이 내려앉은 거리, 나는 목구멍에 걸린 감기를 삼켜요
뱉지 못해 바람은 여전히 아픈 안부를 간직하고
당신의 등 뒤에서 깊은 잠에 들지요
애드벌룬
백수해안도로를 따라 영광의 노을을 훔친다
바다 한 가운데 집을 지은 태양
바닷바람은 발자국을 모아 수평선을 만들고
무덤 같은 이들은 항상 어둠에서부터 울음을 삼킨다
풍경을 왕래한 이들의 속사정에 하늘은 자주 붉어졌다
애드벌룬, 태양은 가장 높은 곳에서 삶을 비추는 구나
노을이 그려둔 이야기를 따라
사람들은 울타리를 높이 쌓았다
붙잡기 보단 저물어 가는 시간들이 있어
오래도록 붉었던 거야
우리는 노을 안에 많은 걸 두었나봐
달력 아래 신년운세를 꿈처럼 키우며 소망을 간직했다
애드벌룬, 온 몸으로 타오르는 태양아
바람과 낙엽은 시시때때로 도로 한복판을 질주했다
우리는 지치지 않았고
버려진 날이면 그 흔적으로 새해다짐을 적었다
모서리에서부터 자라난 품 속
그것을 떠올리다 보면 붉게 물든 홍시가 생각났다
노을은 매번 하루의 끝에 찾아왔다
한 조각을 맞추고 나서야 지붕 위를 오르던 밤
내 안에 둔 고리와 높이 쌓은 볏짚
한 순간으로도 온 세상을 적실 수 있다는데
꿈마다 바람을 말동무 삼아
하늘 높이 올라본다
애드벌룬, 눈동자를 적시는 둥근 샘
붉은 치마를 펼치면 세상은 온통 뜨거워졌다
행복 시장으로 오세요
떡볶이 두 접시, 국밥 세 그릇,
오늘도 행복 시장엔 손님들의
말 많고 정 많은 사연이 모락모락 피어납니다
새처럼 앉은 아이들은 봄이 되어 재잘거리며
오고 가는 발자국의 수를 세지요
서로 다른 보폭으로 흔적을 남겨도
행복 시장은 누구의 발자국인지 알 수 있어요
귀한 걸음들이 환한 마음으로 피어나면
행복 시장은 꽃 인사로 물들어요
종례 후에 손잡고 모인 아이들,
퇴근 후에 어깨동무하고 모인 직장인들,
모두 동그랗게 마주 보고 앉아
나뭇잎 위에 자신의 하루 일과를 줄줄이 써 내려가요
새벽바람부터 지금까지 모인 이야기들
두 손 가득 뭉치면 고소한 밥 향기는 배가 되고
인심 한 그릇과 사연 몇 숟갈만 있으면
너도 나도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되지요
잘잘이 피어나는 세상 모든 이야기가
바로 우리 이야기라며
행복 시장은 붉게 영글어가는 마음도
모두 간직하고 있어요
어느새 한 움큼, 밤바람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를 뜨고
이부자리 편 달빛이 잠시 들렀다 가지요
향기를 묻히는 이들이 있어
행복 시장의 봄은 오늘도
세상 이야기가 모락모락 피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