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차<창작 콘테스트> 시 공모- <범퍼 카> 외 4편

by Joe쌤 posted May 1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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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퍼 카

 

작용과 반작용 사이 밀당이에요

상처는 주고받아야 제 맛이라는데

쉽게 닳거나 멈추지 않을거야

범퍼가 공기로 가득 차 있다면

정말 보이지 않는 두께만큼 안전한 거라면

우리 사이에는 과연

어느 정도의 허공이 필요한가요

바깥세상 보험의 논리는 지긋지긋해서

입의 언어가 몸의 언어에 묻히는

환호와 비명 외에 숨길 게 없는

충돌의 현장을 찾아요

가해자 피해자 따지지 말고 묻지도 말고

즐거운 접촉사고로

그대와 투닥투닥 알아가고 싶어요

도망가지 말아요

이곳은 모면할 수 없는 순간

짝사랑의 순정, 은둔자의 사랑 따위

범퍼 카를 타고 나서는

더 이상 믿지 않아요

페달은 하나 뿐 곧 죽어도 직진

망설이지 말고

액셀을 믿어요

부딪칠수록 까르르 까르르

웃음이 아픔처럼 피어나는 곳

잇몸 만개한 어르신은

좌충우돌 추억을 다시 살고

모자 거꾸로 쓴 개구쟁이는

짝궁에게 겁 없이 들이대는 곳

사랑은 직설적이어서 아프지만

오늘도 주저 없이 시동을 걸래요

신나게 부대끼며 닳아 갈래요



배탈

 

괄약근을 조인다 엘리베이터에 가까스로 오른다 발은 까치가 된다 숫자는 식은땀을 조롱하고 있다 온 몸이 소실점이 된다 운명은 전적으로 화살표에 달렸다 정전이 된다면 차라리 유두가 세 개로 태어나는 것이 나으리라

 

블랙홀 위에 앉아 판사의 자세로 시간을 뒤로 달린다 예수님도 가끔 상한 생선을 먹어 배가 아팠으리라 태초에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소리를 뒤로 토해내면 배탈이지만 언어를 앞으로 토해내는 건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가장 더러운 것이 시가 될 수 있다면 가장 시적인 것도 설사일 수 있을까

 

절박함도 가면일 수 있음을 변기 위에서 깨달았지만 이미 난 백발이었다 세속은 배탈 같이 어제와 오늘이 달랐고 선생님 선생님 하며 다가와 비수를 꽂고 떠나버렸다 아플 때마다 나는 변명을 했고 변명은 무럭무럭 탈 없이 자라 정상적인 배탈이 되었다

윤리와 예의를 잊은 채 나는 홀로 앉아 뒤로 바닥으로 소리를 질렀다 우연적이었고 계획적이었다 나의 배설이 강으로 바다로 흘러나가 누군가의 산소가 되고 영양분이 된다는 생각에 잠시나마 고통을 잊었다 배탈은 일종의 마약이었고 충분히 이기적이면서 이타적이었다

 

나를 배출한 엄마의 약손이 그립다 배출은 결핍이고 결핍은 그리움인데 그리움은 즐겁고 괴롭다 괴롭다가 즐겁고 즐거운데 또 괴로워서 나는 그만,

시를 싼다.


새해 다이어리

 

모스크바에는 모스크바 역이 없다고 했다

 

출발하는 도시의 역은 도착지의 이름을 가진다고

 

속이 비어 있는 소망이 핀란드 자작나무숲처럼 빽빽해질 무렵,

 

세월이 흐를수록 왜 나는 바스러지고 허물어지는 자리가 좋아질까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올해 이루고 싶은 게 있나요

 

겨울의 심장보다 무겁고 차가운 질문들

 

소확행이라고 썼지만 어제 발견된 행성의 이름보다 낯설었다

 

보이지 않는 먼지와 균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는 시대

 

올해는 죽은 화분을 살리는 일을 배워보고 싶다

 

피어 본 적 없는 씨앗이 꽃보다 더 행복하진 않을까

 

하루 종일 노을이 쏟아지는 곳이 있다면

 

자연사(自然死)가 버킷리스트일 수도 있겠다

 

도착지의 이름이 적힌 다이어리 하나

 

소유하고 싶은 밤, 아니

 

별 숲 사이 무한히 헤매고 싶은



환경지킴이

 

집 떠나는 자식들 지킬 수 없고

얼마 없던 재산도 지킬 수 없어

김 할머니는 만만한 골목을 지키게 되었다

 

대책 없이 펄럭이던 젊은 날의 흥분은

남편을 끌고 간 바다보다 더 시퍼런

공공용봉투 되어 나부끼고

 

느리게 더욱 느리게

세월의 모래밭을 걷는다

 

거북이 등딱지 된 세월 어깨에 이고

조아리듯 걸으면 절하듯 줍다보면

담는 만큼 비워지는

신비한 순례의 길

 

뒤집힌 채 발버둥 쳐 보아도

어느 것 하나 땅에 닿지 않는 때가 있었다

뒤집힌 장기와 마음을 가지고 죽어간다는 것

그저 살고 싶어 거북이는

골목에 고개를 내밀었고

 

느리게 더욱 느리게

세월의 모래밭을 걷는다

 

고만 혀유

대통령 상이라도 받으실라고 그랴

 

주름진 미소만 지은 채

거북이 입으로 느리게 뻐끔거리며

마음 속 응어리 하나씩 하나씩 줍다보면

 

귀찮던 일들이 귀중해지는 나이

머리 터진 개의 등도

다 내 등 같아 짠하네

쓰다듬고 싶네

 

골목을 헤엄치는 굽은 등 위로

집채만한 햇빛 얹혀 있고

터진 조끼 사이로 자꾸만

푸른 바다가 새어나온다

 

전봇대와 어깨동무하며 휘어지는 오후



   

죽은 발톱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고 있다

 

절대로 병원은 가지 않을 거야

 

껍질과 본질을 구분하는 일은 늘 쉽지 않았고

 

때때로 뼈와 살은 잘 섞이지 못했다

 

왜 다들 그렇게 쿨한 척 하는지 모르겠어

 

추억은 추한 기억에 불과하다고 스스로 위로했지만

 

피는 밤새 끈덕지게 굳어가며 통증을 쌓아갔다

 

어린 시절 철제 정글짐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다

 

이별을 통보 받은 밤, 빈 골대 아래 주저앉아 울기도 했다

 

끝내 미안하다는 말을 못한 채

 

하늘로 떠나보낸 사람들이 생각났다

 

어둠을 가리고 싶어 나는 양말을 신고 신발을 신었다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건강한 척도 하면서

 

구멍 난 기억을 뚫고

 

치열하게 자신을 들이미는 나의 일부

 

나는 나를 아직도 잘라내지 못하고 있다

 

썩는 만큼 나는 살고 있다

 

 

조성진

death1982@naver.com

010-9016-7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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