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가는 일은 거리를 좁히는 일이라 믿었지만
도로 끝은 도로였다
도로의 나무들은 어느새 숲을 이루고
나는 너에게 다가간 만큼 너에게 더 멀어진다
다가간 만큼 멀어지는 영상은 정지 화면이 없어서
너의 숲과 나의 숲이 이어지는 순간
화면은 정지된 것이 아니라 무한해지는 중
너는 포함되기를 좋아했고
나는 다가간 만큼 멀어지는 일을 좋아했다
너의 빈 공간이 내 영상을 가득 채우도록
숲은 우거진 만큼 간격을 가진다
서로의 눈동자가 서로의 숲으로서
우리는 담아내기만 하는 게 아니야
서로를 이루는 거야
너의 시선이 나를 보여주듯이
숲은 나무를 표현했고
나무들은 표현될 제 차례를 기다렸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마음이 가는 순간이 있었다
먼 곳의 너와 먼 곳의 내가 숲을 이루면
돌아보지 않아도 보이는 것이 많았다
미술 시간
문을 두드리면
그였다
그는 문장을 지워낸다
지워낸 자리에 색깔을 덕지덕지 칠한다
색깔의 조화는 무엇보다 중요했고
문을 두드리면
우리는 그를 반겼다
그는 채도와 농도에 대해 설명한다
색이 짙어진 만큼 밝기를 낮춰야 돼
어두운 것이 가장 어두울 수 있도록
나무를 그려봐
나뭇가지를 표현해봐
잔가지가 많으면
생각이 많아질 거야
가지치기는 거침없이
나무를 베어버리는 일
모든 첫 문장이 마지막 문장이라도 된다는 듯이
베어진 자리가 그림이다
나이테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묘사한다
색깔이 가장 조화로운 순간은
가장 아끼는 색과 가장 꺼려하는 색이 만나는 순간
익숙했던 색의 농도가 변화하면
그는 사라진다
우리는 차례대로 문을 두드리며 그인 척한다
없어진 것을 상상하듯이
각기 다른 색으로 그가 된다
닥터피쉬
당신이라 호칭해서 미안했다
우리는 수면을 배회하고 있다
당신의 발이 수면 안으로 들어오면
우리는 눈이 먼 자들처럼
당신의 발로 일제히 몰려든다
가끔 서로의 눈이 마주쳐도 마주쳤는지 모를 정도로
시야는 오로지 하얗게 물든다
각질을 먹어치우는 행위
벗겨내는 행위
살결과 가까워지고 당신의 안으로 헤엄치는 행위
우리는 투명하게 엇갈린다
붙잡을 것은 내 피부뿐
움켜쥔 채 당신의 기억을 훔친다
당신의 발이 쭈글쭈글해졌다
모든 밤은 과거에서 시작됐고
당신에게서 밤의 그늘이 밀려왔다
수면 안은 어둠
기포가 수면 위로 올라온다
우리가 지닌 표정이 터져나간다
어둠마저도 우리의 호흡이 되는 시간
문고리를 돌리듯이
눈동자가 돌아간다
하얗게 물든 시야가 구름이라도 낀 것처럼
우리는 어둠을 구름이라 착각한 채 먹어 치우고 있었다
표정 수업
사탕을 나눠준다
웃는 사탕, 화내는 사탕, 슬퍼하는 사탕
강연이 시작되면 사탕을 하나씩 입에 넣는다
각기 다른 감정으로 강사를 바라본다
강사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
어색한 표정으로
우리는 웃는 사탕을 입안에 넣는다
봉지 째로 터져 나오는 웃음
그럴 거면 억지로 웃지를 말지
씹히는 건 사탕만이 아니었고
잘근잘근 새어나온다 목소리가
부서진 사탕 조각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듯
희미하게라도 존재한다 때로는 모든 것이
강사인 척 표정을 지어봤다
강연이 끝날 때까지 공통된 표정은 없었다
울음에도 백 가지 표정이 있다는 말을 믿었다
모든 건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한다 각기 다른 감정으로
우리는 그러고 보니 이름이 없었다
출석을 부를 필요도 물론 없었다
모두의 표정이 뒤틀렸다
강연은 끝나지 않는다
마주 보고 있는 강사에게 처음으로 의문이 들었다
강사의 시선이 우리의 표정과 닮아있었다
감정에도 목소리가 담겨있었고
목구멍이 있는 한 통로는 열려있었다
우리는 공유했다 구멍이라는 표정을
표정 뒤에는 항상 다른 표정이 숨어 있었다
편지
가장 멀리서 온 소문이 도착한다
편지의 문체에는 음성이 담겨
구름의 시야를 전한다
틈새로 벌어지는 문
구름 뒤로 드러나는 달
달을 기억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풍경을 전했고
문을 연다
편지가 닿을 수 있게
달의 뒷면을 상상하는 일은 우리의 말장난 중 하나였고
마지막 문장으로 가는 길이 되주었다
두 눈동자가 다르게 기억하는 순간을
데자뷔라고 불러
나는 당신의 시선을 점점 닮아갔고
밤의 산보는 다른 경계로 이탈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우리는 헤어지는 순간에도 다시 만날 것을 예견했고
구름 위 상공으로
점점 멀어진다
당신의 눈동자는 내 눈동자의 뒷면으로
달의 어둠이 시계방향으로 번졌다
별이 쏟아지면 그 간격부터 의심하던 당신의 문장을
내 음성으로 똑같이 발음할 때
구름이 움직였고
달이 보이지 않던 공간을 드러냈다
당신에게 가는 문으로 편지를 부친다
수취인을 명확하게 기재할 수 없는 곳으로
이곳은 문이었고 어떤 곳은 달인 곳으로
김도경
010-5778-4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