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차 창장콘테스트 시 공모('다행입니다'외 4편)

by 야실이 posted Jun 0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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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행입니다.

 

잊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한없이 넓어지는 세상

자꾸만 작아지는 내 모습이

서러워 울며 맞이했던

푸르스름한 새벽을

덮어버릴 수 있어서.

 

돌아볼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하루하루 스쳐간 날들

먼 길을 돌아 걸어온

겹겹이 쌓여

울퉁불퉁한 삶의 너울을

들춰볼 수 있어서.

 

기억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깡충한 단발머리

친구와 함께 했던

가을 날 어느 하루

파아란 하늘을

간직할 수 있어서.

 

기다릴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때로는 잊어버리고

가끔은 기억하고

한 번쯤 돌아보며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다릴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2. 차 한 잔 어때요?

 

둘이서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면

이야기 하나

표정 하나

같이 마실 수 있어서 좋고.

 

 

셋이서 모여 앉아

차를 마시면

이야기 하나

표정 하나

웃음 하나

곁들여 마실 수 있어서 좋고.

 

 

넷이서 둘러 앉아

차를 마시면

이야기 하나

표정 하나

웃음 하나

슬픔 하나

함께 마실 수 있어서 좋고

 

 

둘이면 어떻고

넷이면 어떻랴

따뜻한 차를 마실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으면

더 없이 좋은 것을.

 

3. 체념

 

 

처음 알았습니다.

작은 불씨에

몸을 실어 순식간에

타버리는 종이처럼

보이지 않는 내 가슴도

새까맣게 타버린다는 것을

 

원하지 않아도

내 앞에 놓여지는

현실의 빈 그릇들

채우고 또 채워도

밑바닥을 드러낸 채

초라하게 비어있고

 

 

원하는 것들은

내 앞을 스쳐지나

아쉬움 가득한 손짓만

잡아도 또 잡아도

손아귀를 빠져나가

허허로움만 남아 있고

 

 

이제야 알았습니다.

초라해지고

허허로움이 불씨가 되어

새까맣게 타 버린

가슴 속에 남아있는 것이

묵묵한 체념이라는 것을

 

그 체념을 안고

맞이하는 내일.

 

 

4. 가을의 시작.

 

아무 표정 없는

아파트 주차장

비어있는 자리에

누군가 널어놓은

빨간 고추

 

 

 

햇볕 한 줌

꼭꼭 채우고

바람 한 자락

그 위에 채우고,

 

 

한 걸음

그렇게 가을은

시작되고 있습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야트마한 푸른 산

나무 사이사이로

조금씩 비어가는

황토빛 자리.

 

지리한 장마

꼭꼭 묻고

뜨거운 열기

그 위에 담고

 

두 걸음 그렇게 가을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한 뼘쯤 높아진

쪽빛 하늘

가슴을 열고

들이마시면

 

 

온 몸 구석구석

시린기운에

하나, 둘 깨어나는

쉰여덟의 삶의 너울.

 

그렇게, 그렇게 가을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5. 어머니.

 

동그란 내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할 무렵

언제나 당신은

나의 세상 전부였습니다.

 

당신의 품에 안겨

눈부시게 부서지는

햇살을 보며

희망을 갖고

 

당신의 등에 업혀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며

꿈을 키우고

 

당신의 손을 잡고

서툰 발을 내딛어도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한 해

두 해

세월이 흐르고.

 

 

갸름한 당신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면서

어느새 나는

당신의 세상 전부가 되어버렸습니다.

 

 

내 웃음 소리에

당신의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환해지고

 

퉁명스러운 내 몸짓에

당신의 가슴은

풍선 속처럼 텅 비어가고

 

 

내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가면

든든하다고 하셨습니다.

 

한 해

두 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언제나 당신은

나의 세상 전부입니다.

 

어머니.

 


정순옥

jungso0915@naver.com

010-2299-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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