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차 창작콘테스트 시 부문 공모 -<하루를 그렇게 살아봤으면>외5편

by 양셩 posted Jun 0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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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그렇게 살아봤으면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몰려드는
블로그 속 그 장소
서울의 핫플레이스로 향해 떠난다

눈이 감긴 사진
하늘을 나는 사진
카메라 셔터가 바쁘게 일하는 소리가 들린다

같은 장소 다른 포즈로 무심한 듯
괜히 다른 곳을 의식하며 찍은
갤러리 속으로 담아보는 수 백 장의 사진들 

집에 들어오자마자 켜는 컴퓨터
내 눈에 차는 사진 몇 장 골라
친구들이 좋다는 사진 몇 장 골라
옮겨 닮은 사진들을 펼쳐놓는다

삐져나온 볼살과 입은 안으로 밀어 넣고
빗살무늬토기 밑 부분처럼 정교하게 깎은 각진 턱
도움 없이 경험해보지 못할 180센티미터

섬세한 손끝 하나에서 태어나는 생명
이 순간만큼은
합법적 사기꾼이 된다

사진 속 그 사람처럼
하루를 그렇게 살아봤으면

코로나19

지금 어느 곳을 가도 내가 있다
노크 없이 들이닥친
미세한 입자를 가진 불청객 때문이다

가려진 하관 위로
살짝 찢어진 눈만 빼꼼 내밀고서
저 멀리 들려오는
눈동자 구르는 소리가 있는 곳
그곳에 또 다른 내가 있다

소리의 먹이사슬이 존재하는 카페에도
사람 하나 없는 적막한 길거리에도
내가 있다

사레들려 잘못 내뱉은 헛기침 소리 하나에
곁눈질로 보내는 암묵적인 메시지
나와 내가 하는 술래 없는 숨바꼭질
미련의 여지조차 주질 않고 그 자릴 떠나버린다

손 비비기 바쁜 파리가 된다
도망 다니는 방랑자가 된다
방구석의 겁쟁이가 된다

어느 곳을 가도

그곳에 내가 있다



식은 밥

이른 새벽
일찍 일어나 벌레를 잡아먹는 새보다 더 먼저
부스스한 머리 양옆을 꾹꾹 눌러
우리 형제를 등에 업고
집을 나서는 사람

어부바라는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전기장판같이 포근한 곳에 고이 잠든
우리가 깨지 않도록
잘 자고 있나
열지도 않은 건물 유리로 힐끔힐끔 쳐다보던 사람

일 년에 한 번 오는 날을 핑계 삼아
그들을 위해 냉장고에 꺼낸 반찬들로
식은 밥상을 데워본다

어장관리

어릴 적 짧게 만났던 여자가
벌레 한 마리조차 잡지 못하던 그녀가
낚시 카페에서 일한다

손님들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물고서
격렬하게 구애의 춤을 뽐내던 물고기들
그런 이들의 입에 걸린 낚싯바늘을 빼주던 그녀

시간에 맞춰 사방으로 널리 뿌리는 밥과
퇴근하기 전이면 비좁은 수조의 물을 갈아주는
정성이 지극한 그런 여자

다 헤진 비늘을 지니고
뚫린 입천장에 난 구멍들을 가지고서
나를 경계하는 몇 백 마리의 물고기들

그녀의 어루만지던 손길이 그리워서
비좁은 수조 안으로 들어온  
그녀가 던진 미끼를

다시 한번 물어본다


앵무새로 살기에는


앵무새처럼 하루에 몇 번 같은 말로
당신의 마음을 녹였는지 모른다


사랑한다고 하루에 몇 번 보내는지 모른다
보고 싶다고 하루에 몇 번 보내는지 모른다


예쁨 받는 방법을 안다

칭찬 받는 방법을 안다


너만의 앵무새로 살기에는
클립보드에서 붙여 보내는 걸 너는 모른다


네가 남겨준 자리, 그저 내겐 안식처 

당신이 나에게 남겨준 자리가 하나 있어요.

완만한 경사에도 미끄러져 넘어지는
헛디딘 내 발 탓만 하면서
부실한 기초공사를 탓하면서
소중함조차도 가볍게 여기던 그 자리

당신이 내게 남겨준 자리를 원망했을 때가 있어요. 

흠잡을 데 없는
기초공사 튼튼한 건너편 아파트로 입주해 
부귀영화 같은 삶을 누리는 상상하면서

당신이 남겨준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재개발 공사 현장 기초 구덩이 속
어두운 흙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저 열린 마음의 여지인 것 같아

당신이 유일하게 생각한다고 나에게 남겨준 자리일 뿐이라서
그저 선택지 없는 유일한 안식처

당신이 나에게 남겨준 자리 난 그곳에 아직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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