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회 창작콘테스트 시부문 응모 문득이라는 곳 외 4편

by 도레미파 posted Aug 3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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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이라는 곳

 

 

문득이라는 신발을 신었습니다 이 신발을 신은 것은 아주 문득이지요 이놈은 걸을 때마다 똑, 똑하고 시계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는 시간을 걷는 것이지요 시간을

 

문득, 문득

 

넘기는 것이지요 이놈은 무엇이든 문득, 문득 넘기니까요 계절을 변검 하듯이 바꿔대니까요 나뭇가지에 가면들은 남아나질 않습니다 가면들이 모두 벗겨지면 맨얼굴은 없습니다

 

문득, 깨달은 건 텅 빈 가지는 겨울이라는 것입니다

 

겨울은 거울이라는 공간처럼 시선을 가둡니다 겨울은 거울이라는 도구처럼 사물의 단면을 반대로 보여줍니다 겨울은 문득이라는 신발에서

 

뽀드득하고 소리가 나게

 

눈이 오면 계절이 멈추게 합니다 사람은 사람을 따라, 발자국이 발자국을 따라, 갔던 길은 갔던 길을 따라, 문득하고 멈추지 못합니다 소리는 지금 유일합니다

 

뽀드득하고 소리가 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소리가 유일해지는 느낌 사람들은 기차 행렬로 걷고 있습니다 수많은 발자국을 견디는 눈의 비명이 뽀드득하고 들려옵니다 문득이 문득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듯이 소리를 먹어버리는 소리입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눈이 내리면 발자국은 지워집니다 발자취는 다른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 걸음을 재촉해요 재촉은 기차처럼, 도로는 무한 눈밭으로 사람들이 걸었던 발자국 위를 그대로 걷습니다 다른 자국 없이 매끈하게

 

문득, 사람이 사람을 잃어버리면 걸음을 쫓으면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문득하고 번뜩이는 생각은 발자국의 자리에서 떠오릅니다 행렬에는 이탈이 없습니다 발자국에는 걸음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대칭의 모습으로 소리는 계속됩니다 행렬 너머의 행렬을 기억합니다 믿는 일은 하나로 만나는 일입니다 두 손이 포개지듯이 행렬은 포개집니다

 



회전

 

 

동전은 앞뒤가 다르고

사람은 앞뒤가 다르다

 

비는 양면성이 있고

땅에서 하늘로 올라갈 때

 

데려가지 말라는 영혼을 데려간다

 

처음으로 신에게 빌었다

놀이동산에서

엄마의 손을 놓치는 순간이

첫 이별이었듯이

 

이별을 밥 먹듯이 하는 삶은

배가 부르지 않고

공복은 새로운 공간을 찾는다

 

이동에도

장벽이 있어서

기차를 타면 옆 좌석의 사람을 가만히 쳐다보기도 했다

그러면

 

당신의 세상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이별했다

 

나로 돌아오기까지는 꽤 오랜 여정을 거쳤다

나이가 지긋이 먹은 내가

방 안의 책상에 앉는다

 

죽을 때도

이런 비슷한 감정이 들 것 같았다

 

동전은 여전히 앞뒤가 달랐고

사람은 입체적으로 펼쳐졌다

 

그 안에 묘지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개명을 했는지 낯설게 적혀 있었다





미안은 이제 다른 이유였다

 

 

미안이라는 단어에는 얼굴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세수를 한다

아침이면

표정을 벗겨낸다

구름과 닮은 휘핑크림을 좋아하고

카페에서 음료를 시킨다

타인은 타인에게

미안이라는 말을 하루에 몇 번 정도 할까

오늘 그 숫자를 세다가

내 안에 날씨는

흐려졌다

 

비가 내린다

여름을 품고

겨울이 부딪치며

적지 않은 온도계가 필요했다

온도를 측정하고 지금을 살아야 한다

지나치면

잊을지도 몰라서

내가 만난 이들이

기쁨과 지루함 중

더 가까운 단어에 속하는 일을

종종

걸음이 기후와 가까워지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걸어가는 걸음이 오늘의 운세처럼 하루를 예언했다

관상을 믿지는 않았는데

미안이라는 표정은

구름의 일부가 되었다

 

비가 내리면

아픈 신체가 하나, 둘 생겼다

 



요정의 일

 

 

꽃은 색채를 잃자 별의 형상을 지니게 됐다 요정은 땅으로 내려왔고 날개를 떼어냈다

 

별에 별을 겹쳐낸다 이곳은 별빛 무대, 꿈으로 가득 찬 형상 지금을 기억해내기 위한 변주가 밤을 춤추게 만든다

 

모두가 두리번대고 있다 모두가 마주치고 있다 모두가 안에 있고 모두의 눈에 구멍이 생겨나고 있다

 

동굴같이 깊게 이어질 것이다 밤을 백 마디, 천 마디로 늘려 부를 거야 노래가 시작될 거야

 

밤의 요정과 낮의 요정은 구별됐고 잎이 떨어진 자리에서 달이 구르고 있다 동그랗게 밤의 결을 따라 별을 팻말삼아 구르고 있다

 

눈을 떠보자 손을 뻗어보자 귀를 자세히 기울여보자 방향을 지시해보자 암술과 수술 그 경계를 무너뜨려보자

 

달이 구르는 중심으로 모든 것이 회전하고 있어 수많은 행성들이 쏟아지듯이 별이 부풀었다 흐려졌다

 

우리는 이곳을 기억해야 돼 이곳은 요정이 지나간 곳 날개를 떼어낸 자 앞에서 어둠을 어둠으로 표현하는 일은 거짓이다

 

달이 구르고 있어 요정은 그 뒤를 따라 노래를 부르고 있어 모두가 이 행렬에 동참한다 숲이 움직이고 있다 숲이 숨을 참고 있다 우리 옆으로 밤이 쏟아지고 있었다

 




 

미술 시간

 

 

문을 두드리면

그였다

 

그는 문장을 지워낸다

지워낸 자리에 색깔을 덕지덕지 칠한다

 

색깔의 조화는 무엇보다 중요했고

문을 두드리면

 

우리는 그를 반겼다

그는 채도와 농도에 대해 설명한다

색이 짙어진 만큼 밝기를 낮춰야 돼

 

어두운 것이 가장 어두울 수 있도록

 

나무를 그려봐

나뭇가지를 표현해봐

잔가지가 많으면

생각이 많아질 거야

 

가지치기는 거침없이

나무를 베어버리는 일

모든 첫 문장이 마지막 문장이라도 된다는 듯이

베어진 자리가 그림이다

나이테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묘사한다

 

색깔이 가장 조화로운 순간은

가장 아끼는 색과 가장 꺼려하는 색이 만나는 순간

 

익숙했던 색의 농도가 변화하면

그는 사라진다

 

우리는 차례대로 문을 두드리며 그인 척한다

없어진 것을 상상하듯이

 

각기 다른 색으로 그가 된다





성명 : 김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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