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차 창작콘테스트 시 부문 공모 <마주치는 오늘> 외 4편

by 도레미파 posted Dec 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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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치는 오늘

 

 

무엇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네가 자꾸 뒤를 돌아봤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마네킹이 겪고 있는 밤처럼 움직임을 잃었고

가로수는 바람의 촉감을 의심한 채 몸을 떨었다

 

과거를 잊은 인간에게는 땅의 온기가 존재하지 않아서

너는 다시 뒤를 돌아봤다

과거는 숨 쉬는 법을 앗아가

모두에게 공기는 이제 얻을 수 없는 희망이야

호흡을 멈추는 세계가 있다

시선 앞에서 사물의 그림자가 짙어질 때

시선 뒤에서 연결을 잃는 공동체가 있다

 

고요 속에서 기도가 시작되었고

무엇도 대화를 나누지 않는데

너는 자꾸 중얼거리며 독백의 대화를 반복했다

무엇도 너를 책망하지 않는데

너는 자꾸 네 안에 커다란 동굴을 지녔다

무엇도 너는 될 수 없는데

무엇이 되려고 작은 돌멩이 같은 것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작은 기도를 네 몸에 품고 다녔다

고요를 믿지 않는 도시에서 고요를 지니고자 했다

너의 뒤에서 고요와 죽음 그 경계를 이탈하는 자가 종종 있었고

모든 것의 옆에 머무는 탄생 같은 게 있었다

 

너는 자꾸 뒤를 돌아본다

지금 움직이는 존재는 밤의 다른 이름이었다

너는 자꾸 뒤가 된다

미래의 잠식을 슬퍼하지 않는 게 슬픔을 이해하는 방법이었다

너는 자꾸 앞을 미워했고

앞과 뒤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게 네 시선에 대한 해석이었다

손이 손을 마주잡는 일이 도시의 새로운 유형이 되었다

소리는 부재하지만 너의 중얼거림에서 시작되는 것이 있었다

무엇도 너를 쉽게 이해한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유효한 것들

 

 

고양이에게 주어진 시간은

골목길의 각도만큼 다르게 벌어진다

 

낮과 밤

하루를 거니는 행인을 만난 만큼

고양이는

시간이 늘어나고

 

비가 내리면 밤이 멀어졌다

시선이 행위를 왜곡하고

고양이는 운다

 

무리를 부르는 것도

싸우는 것도

아니었다

 

오직 자신을 향해

오직 자신이 지닌 눈동자의 이해에 대해

 

하루를 끝내는 것보다 시작하는 것이 더 어렵다

끝과 시작을

바꿔 부르고

아침이 끝이고

 

해가 뜨면

골목길을 통해 잠의 노예들이 출근한다

밤사이

꿈에 시선을 먹혔다

 

고양이를 마주쳤던 모두는

고양이에게

자신의 하루를 헌납하며 이승을 퇴근한다

 

길거리 고양이들은 뜯어진 참치 캔으로 끼니를 채운다

죽은 이들의 몫까지

 






와해된 만남

 

 

오늘의 뉴스

사랑이 사랑을 믿지 못한 변사체 발견

노숙자들 이야기인 줄 알고

클릭하지 않으려다가

그 안으로 들어간다

옛 애인이 죽어 있었다

아직도 내 사랑을 시험하는 중이라는 듯이

우리는 내기를 했다

누가 누구의 눈물에 더 피눈물 나게 할지

하필 내 생일날

선물로 돌아왔다

선물의 포장은 댓글이고

그러게

베어진 상처에는 진물이 나와

그러게

약속에도 순서가 있어서 생일이 이른 사람이 불리해

그러게

그 어떤 누구도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은 없어

 

내일의 뉴스

오후 2

밤을 숨기고 있는 하늘 아래서

다른 시신 발견

유서는

서로가 서로의 책이 되자

가령

내가 너의 이야기이고

네가 나의 이야기인

소설이나

시집이나

 

밖에다 소문을 내자

들려오는 이야기가

왜곡되고

왜곡되어

커다란 비밀이 되자

그렇게라도 가끔 마주치자

오후 2

세상에 출생신고와 동시에

사망신고를 한다

 

그렇게라도

서로의 안부가 되기로 한다

 

사후의 뉴스

죽은 뒤의 세계에서

너와 내가 마주친다

 

이후를 꿈꿔보자

그렇게라도

사랑을 이해해보자

 

만나면 서로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는지부터 확인할지라도






달의 뒷면

 

 

어느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공중화장실을 들고 다녔다

그들은 볼일을 자주 봤는데

변기의 레버가 왜 오른쪽에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수많은 시인들의 시에서 오른쪽과 왼쪽이 시어로 등장했다

화장실 안에는 항상 시집이 있어 볼일을 볼 때마다 의문이 더 깊어졌다

 

예수는 말했다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도 대라고

여기서 시가 시작됐을까

왼쪽 뺨을 때릴 때의 손은 오른손일까 왼손일까

볼일을 마치면 변기의 레버를 내린다

오른쪽 레버와 오른쪽 손이 만난다

배관을 타고 수많은 당신들과 마주할 거란 믿음이 들었다

 

왼손잡이는 레버를 돌리기 위해서 허리를 깊게 돌려야했고

허리를 잔뜩 돌리듯이

우리에겐 하나의 세계가 창조된다

거리에는 화장실들이 멈춰있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이 회오리치며 노폐물을 끌고 간다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을 때는

깜깜한 밤이었다

 

달이 떠 있었고

보이지 않아도 두리번댔다

달 표면의 크레이터에는 구멍 같은 표정이 있었다

시선과 시선이 서로의 구멍을 탐색하는 아찔한 속삭임이 있었다

 

어둠은 하나의 크레이터였다

왼손을 뻗으면 다른 왼손이 찾아와 악수를 했다

촉각만 존재하는 묘한 눈 맞춤이었다







겨울 아이

 

 

겨울의 숲에 집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아무도 없는 것이 마음의 형상과 닮았고

가만히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이

오랜 기억의 일부인 것 같았다

 

집 안에서 너를 기다리지만

들어오는 건 또 다른 나의 모습이었고

 

내 앞에 내가 서 있었다

 

책상에서 적는 것이 편지가 아니라 일기일 수밖에 없는 것은

네가 없는 이야기라서

내 시선에 대한 문장만이 적혔다

 

숲으로 사라진 너를 기다리고 있어

내리는 눈이 시야를 가린다

 

서로에게 겨울이라는 기억이 되기로 약속하며

우리는 어린 시절 헤어졌다

 

하얀 궁전이 우리에게는 놀이터였는데

이제는 이별의 성지가 되었다

 

바깥으로 나간다

겨울이 나를 등지고 있다

 

너를 부르는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돌아오고

 

숲 안에서 내가 나오고 있다

너와 닮은 사람이 있을까 봐

 

시선을 헤매도

내 얼굴이 내 얼굴과 마주하고 있다





이름 : 김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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