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회 창작콘테스트 공모 - 김시연

by 은월랑 posted Oct 0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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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너에게 보낼 편지 B

 

눈 깜짝할 사이에

너와 나를 봉해버린 윙크

그것은 오로지의 어머니, 도무지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들락거릴 수 있는 아늑한 쥐구멍이 없지

어깨에서 털어져 내려오는 먼지의 서러운 온기가 없지

천진한 아이들이 던져 올린 희망의 미립에

두둥실 떠오르는 구름이 하늘엔 없지

포들거리는 감자를 사랑할 수 없지

 

이곳에서 코끼리는 코끼리이고 쥐는 쥐이고 사랑은 사랑이어서

만세를 부르면 누군가가 손바닥을 떼어 가져가고

뒤 이은 좀도둑의 눈물을 반기는 건 비 밖에 없지

 

열린 가슴으로 태어나

닫힌 세계에서 동가식서가숙하는

눈코입이 달려 슬픈 짐승의 족속

섭취와 배설이 혼합된 순환의 세계

 

다시는 배가 고파지지 않기를 기도하며

새우처럼 등을 말아 올린 네가 잠든 후에야

나는 겨우 너에게 쑥스러워진다

 

뒤에서 너를 살포시 껴안았는데

야윈 뼈마디는 텅텅 비어 있어서

진작 채울 곳 많게 부풀어오른 몸뚱이가 풍선 같았다

, 내가 그 허한 추공 속에 불어넣을 수 있는 게 숨결이라면

비로소 나는 아마 웃을 수 있을지 모른다






나의 環
나로부터 항상 저만치 떨어져
무수히 많은 점을 찍어낸 너
내 보폭보다 좁은 거리
다가서는 한 걸음에 다시금 멀어질 거리
너와 내가 태어난 거리

어느순간부터
훤히 보이는 앞길로 나아갈 수록
냉기 찬 표면에 볼을 부빌 뿐이었다.

나의 歡
유리 어항
모난 데 없는 원 속에
갇혀
뻐끔거리는 붕어
자그마치 둘
서로를 향해 뻐끔거리던
우스꽝스런 입맞춤

몸부림을 치며 헐떡이던 너와
둥둥 떠오른 네 숨을
받아 먹고 자란 나

나의 還
구석 없는 원 속에
모든 걸 다 들춰내고
발가벗은 채로 빙그르르 돈다

둥근 유리 어항
그 안에 너
그 안에 나
이건 장난이야,
악마의 장난이야

나의 患
영원하자며
잠결에 그려진 원이 무서워
아무도 모르게 도망갔지만

나의 길은 너를 둘러싼 거리에 굳었다
뻐끔거리는 나의 짐승은
이곳에 남아
네가 뱉은 독을 들이마시고
들이마신 독을 뱉었다



무도(舞蹈)


깎아지르는 절벽 위

눈 먼 사자가 돈다

제 꽁무니를 좇으며 돈다


내가 내어준 것은 부끄러움이고

네가 내온 것은 순수였다

느낌에 흔들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족했었다


너는 자꾸만 나를 메우려 든다

내 안의 공허가 네 탓인 줄을 안다

네 몸의 자리였음도 안다


기울어진 사장(沙場)오르며

풍향의 경박함은 대지를 쓸어갔더랬다

위태로워졌다


한때는 빳빳한 돌멩이였을 모래

그 위에 민들레씨가

기진맥진해 몸을 뉘었다


너에게 난

조금만 더 조아리기로 했을 뿐이다

조금만 더 무르고 약해지기로 했을 뿐이다


눈 먼 사자가 어딜 부라릴 수 있겠냐마는

흰자만 부릅뜬 채로 널 찾아갔다

결국엔 빛의 굴절에 섞여들었다


총상에 쓰러진 부상병처럼

장렬하게

너의 통곡을 한껏 떠맡고 싶었다


너는 한없이 무고해서

날마다 하늘에 경배하고

나는 고지에 올라 원을 그린다

제자리로 제자리로


만일에 내가 낙하한다면

높이 쳐든 네 팔로, 품 속으로

그렇다면 그것은 낙화다


눈 먼 사자가 돈다

제 꽁무니를 좇으며 돈다





페인트 잇 블랙

추방과 구원이 반복되는
나의 신화 속에서
너를 가두고 싶었어

너를 위해 검정색 크레파스를 집었어
너를 위해 검은 눈물을 흘릴게

내가 가슴을 열어 젖히면
그때는 나를 활로 쏘아주겠니
나는 눈을 질끈 감아
실은 너무 오랫동안 감고 있었거든

발이 곪은 사람처럼 내 눈을 찌르기에는
아프지 않을 거야 저주받은 내 손가락처럼
그러니 검정색 크레파스를 가져와
내 눈을 까맣게 칠하자

벌레가 되어 네 심장을 파먹고
네가 흘린 것은 달짝한 과즙이었어
젊지도 않게 어린 너와
납덩이를 녹이는 너의 무지가
선명하게 남기고 간 혈흔이었어

그러니 검정색 크레파스를 가져와
내 혀를 까맣게 칠하자
세상의 모든 단맛은 비극이란다

목이 매달린 듯한 긴장 속에서
태연하게 걷는 우리를 보면
정갈한 글씨도, 거실의 텔레비전도 결국엔
파열의 유혹을 이기지 못할 테지

그럼 나는 그 파편을 주워담아
주먹을 꼭 쥐어 평생 간직하는 거야
뭉친 살덩이로 뒤엎은 채로
손에 쥐고 있는 거야

그러니 검정색 크레파스를 가져와
내 손을 까맣게 칠하자
너를 매만지는 내 손이 보이지 않도록

교통표지판처럼 사람들은 빳빳하고
날마다 내 이름 석자를 호명하지
나는 그 사이를 비집고 흘러
먹물처럼 매끈하게 그들의 외다리를 뒤엎는 거야

나를 삶에 붙들어줄 사람을 찾아 헤매는데
저만치 앞에서 내 이름을 가려준 건 너였어
꺾어진 꽃을 향한 위태로운 사랑으로

박제는, 굳은 이름은,
잔인하게도 끔찍히 아름다운 거 있지
그러니 검정색 크레파스를 가져와
너를 까맣게 칠하자 그리고 나를 까맣게 칠하자
이제 더 이상 너를 보기 위해 눈을 감기는 싫어

우리 춤이나 출까?
그러니 검정색 크레파스를 가져와
해변을 까맣게 칠하자
검은 바다에서 너와 함께 춤을 추고 싶어
나를 아무도 없는 해변으로 데려가줘

저기를 봐, 파도가 밀려와
새까만 바다가 중력을 역행하며 기립해
곧 우리를 덮쳐버리고 말 거야

이제는 노래를 불러
차오, 벨라, 차오
차오, 벨라, 차오

검정색으로 칠해진 나는
검정색 바다에 가라앉으며 이렇게 외쳐
그대, 내 곁에 영원히



*제목, 그리고 검은색으로 칠한다는 모티프는 Rolling Stones의 <Paint it, Black>에서 가져왔음을 밝힘.







흩어지는 계절을 탓한들

못다한 우리의 결속은,

그리고 정갈한 목례는,


어쩔 수 없다


먼 길, 기어서 보름

내 안의 나를 죽이러

나는 떠났다


나의 시를 위해 그대는 죽어라 그대는 죽어서 나의 시가 되어라 그대를 위해 나의 시는 죽어라 나의 시는 죽어서 그대가 되어라 나의 시를 위해 나의 시는 죽어라 나의 시는 죽어서 나의 시가 되어라 그대가 되어라 나의 시는 죽어라 그대를 위해 그대는 죽어라


괴사한 죽음은

돌처럼 단단히 굳어 붙고

나는 화석을 잉태한다


달밤, 뒷골목 한 가운데에

대자로 뻗어 누워

서정시인처럼 별을 세고


나는 시를 쓰고

시는 나를 쓴다






김시연

whitehobb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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