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의 달세뇨
지은이 : 이재운
오선지에서 마음껏 노닐다 가는 시간
너는 네 마음대로 오갈 수 있겠지만
나는 도, 시를 왔다 갈 여력이 안 돼
어디까지나
두 귀를 혈액순환하는 외장형 핏줄에 나오는
무의식을 멈추면 인식하는
그 정도로만 꿈을 향유할 뿐인 걸
지금은 펜을 잡아야만
사람들의 기호에 맞출 내 의식을 깎아야만
배를 채울 수 있는 걸
가끔은 바람이 이끌고
수풀이 일제히 누워있는 들판에서
오색빛깔 영롱한 추억을 빚을 때 떠올리지만
지금 바래진 기억에 매이면 큰 코, 다칠 거야
울음을 팔아야만
엷은 한 조각 미소라도
지금은 여유를 접어야만
화풀이 대상이 되어줘야만
생을 굴릴수 있는걸
어차피 맞서 싸워야만
챙길 한 몫이라도
늦깎이로 치부된 이상은
두툼한 봉투 하나에 밀리고 마네.
암연
지은이 : 이재운
폐부를 찌르는 강성한 햇볕처럼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는다 해도
둘은 상처를 가공하기에 더 자라난댔지
우중충한 종이 위에 맺던 작은 희망
하트 모양의 두 엄지 손가락 자국은
파스텔 가루처럼 비선명한 서리 자국이었어
모진 톱질에 잘리듯 세상이 잔혹해도
우린 그루터기처럼 자라난댔지
염원의 불꽃이 타는 만큼
반대로 더 얼었을지 몰라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면 그래
응어리를 삼키며
다가온 신자유에게도 작별을 말하지
시공간을 비튼 이 공간에
빨간 지붕 쓴 집 짓고
단란하게 이 곳에 머무는 둘을 그렸건만...
미약하게나마 밝은 날에 조차도
서로를 부둥켜 안지 못 하고
운석같은 우박을 맞고
이름 모르는 곳에 각각 격리되어야 했어
우린 청춘을 더럽히지 않았다 말해.
고통 사고
지은이 : 이재운
값어치 없는 것들을 충동구매 해
돈의 무게를 털어버리련다
꽉 찬 카트를 계산대로 밀어
서푼 같은 거래를 한다
멍청한 방법으로 행복 팔고
얻는 건 질 나쁜 고통,
한 줌의 사고를 산다
나를 향해 외치는 불쏘시개 같은 아우성
얼굴이 뜨거워지면 더 호탕하게 웃는다
이토록 결단력 없던 내가
치밀하게 일을 수행하는 순간이다
가로등 고장 난 이차선 도로에 나와 나의
든든하게 못 된, 배부르게 되바라진 꼴을
보아라.
부딪칠 준비 다 되었다.
오렌지 나무
지은이 : 이재운
저녁에도 싱싱하게 영그는 열매
빛이 뜨문뜨문 공간을 좁힌 시간에도
장식용 분수처럼 멀리 퍼지는 향기
주홍빛이 넘나들어
내 옷에도 살포시 들어왔다
익을수록 절정으로 가는 향그러움
꿈꿔왔던 나의 밍기뉴는
온 세상에 가지를 뻗어 뒤덮고
멍멍한 느낌의 구름을 건드려
비 대신 달콤한 과즙을 뿌려주었다
마른 피부에 스며오는 알록한 상큼함
그건,
‘태양이 잠을 자러 가기 전에
하늘에 하품을 띄워준 거야!‘
황혼이 깃든 늦은 오후에는
유난히 나무의 향이 짙었다
해 지는 무렵에
지은이 : 이재운
점점 짙어 진다
새벽 공기 닮은꼴 하늘에
스멀스멀 어둠이 덮쳐 흐른다.
해질녘 풍경을 응시하며
더는 그 물감이 진해지지 않길 바라지만
하나 둘 고등학교 자습시간에
켜지는 네모난 불빛
그럴수록 빨리 찾아오는 밤
공장의 매연처럼
야외의 암전을 끼얹는 시간
온화한 스님과 같이 농익은 밝음이
소멸하면 안 되는데…
오묘한 맛을 낸 바깥 풍경은
여느 때와 같은 시간에 암전되네
모든 별이 눈뜨면 모를
희귀한 순간이 지금인데…
태양을 살라먹는 노을 없이
파스텔 톤의 참 빛 하늘
그 곳은 탄산수같이 청량하고
심장 밖 또 다른 설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