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너는 내게 나도 몰래 스미듯 번지듯 흘러왔노라
부드러운 석륫빛 혀, 속삭이듯 핧아내듯 날 벗겨서 삼켜내듯 흘려내듯 입 맞췄노라
반짝이는 비췻빛 눈, 새겨보듯 흘려보듯 날 잡아서 속박하듯 후벼 파듯 눈 맞췄노라
나는 네게 나도 몰래 잠기듯 감기듯 구속됐노라
곱디고운 상앗빛 손, 쥐어뜯듯 긁어내듯 날 안아서 쥐어짜듯 개어내듯 젖붙였노라
고아하니 백자 빛 발, 죄어 묶듯 갉아내듯 날 엮어서 짓누르듯 굴러내듯 접붙였노라
나는 내게 나를 씌워 밀치듯 흔들듯 훑어냈으나
삭아 내린 오디 빛 폐, 살라지듯 헤어지듯 널 묻어서 스러지듯 흩어지듯 찢어졌노라
바스러진 진줏빛 뼈, 삭혀지듯 후려지듯 널 묻혀서 사라지듯 흐려지듯 째어졌노라
너는 내게 너를 씌워 기대듯 감싸듯 휘어왔구나
가라앉는 무채색 빛, 소리치듯 소리 없이 날 데리고 짓누르듯 찔러내듯 끊어냈노라
너는, 나는, 우린 그러했노라.
흐르지 않는 9분간
다들 어디론가 걷고 있다
그리고 나를 보니
뱅글뱅글 돌고 있다. 제자리를
나는 방향타 잃은 배, 갈 곳 몰라 돛 접어둔 배
다른 이들 끌어주던, 표류를 끝내주던
가로등 누런 불빛은 내게만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아니하였다
컵라면을 다 먹은 난 다도해 속 섬처럼 많은
가로등 불빛이 허망이 길 비추는
도시로 표류하러 닻을 올렸다
언젠가 내게 올 보물섬 찾아
언젠가 나 올적에
어버이 우셨거늘
이제 와 나 갈 적에
뉘 있어 울어주리
애닯다 세월아
서럽다 시간아
돌아본들 돌아올 줄 모르고
후회한들 흐를 줄만 아니
돌아보면 회한이요
되새기면 눈물이나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나 이제 눈 감으면
천국도 필요 없다
지옥도 필요 없다
스러지면 그만인걸
고뇌한들 무엇하리
갈망한들 무엇하리
처음부터 아니 온 듯
조용히 사라지리
말없이 사라지리
이상향
엎치락뒤치락
무서워해 가며 불안해해 가며
내 가슴 쳐가며 네 가슴 쳐가며
너를 밟고 또 나를 밟고
질척이는 진창을 밟아가며
눈물 콧물 질질 흘려가며
그래도 가고 싶던, 그리도 가고 싶던
그곳은 어디 있나
내 가슴에 있나 네 가슴에 있나
아니면 어느 날 밤
소리죽여 울던, 날 보며 울던
울어매 가슴속에 있나
탄생
당신이 저를 불러주셨을 때
비로소 저는 태어났습니다
당신 안 저는 살아있었습니다만
당신이 저를 지우고자
눈물 흘리셨을 때에도
당신이 저를 지키고자
눈물 흘리셨을 때에도
저는, 살아있었습니다만
두 손을 꼬물꼬물 휘두를 때에도
두 발을 아장아장 휘저을 때에도
어디에도 닿지 않는 몸짓이었습니다
어디로도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였습니다
당신이 저를 불러주셨을 때
비로소 저는 태어났사오니
제 손짓이, 발짓이 당신께 닿았습니다
제 웃음이, 울음이 당신을 울렸습니다
당신이 주신 의미가 생명이 되어
그제야 제게 깃들었나니
당신이 저를 불러주셨을 때
비로소 저는 태어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