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차 창작콘테스트 시 공모 - 우울증 외 4편

by 현건 posted Oct 3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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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너는 내게 나도 몰래 스미듯 번지듯 흘러왔노라

부드러운 석륫빛 혀, 속삭이듯 핧아내듯 날 벗겨서 삼켜내듯 흘려내듯 입 맞췄노라

반짝이는 비췻빛 눈, 새겨보듯 흘려보듯 날 잡아서 속박하듯 후벼 파듯 눈 맞췄노라

나는 네게 나도 몰래 잠기듯 감기듯 구속됐노라

곱디고운 상앗빛 손, 쥐어뜯듯 긁어내듯 날 안아서 쥐어짜듯 개어내듯 젖붙였노라

고아하니 백자 빛 발, 죄어 묶듯 갉아내듯 날 엮어서 짓누르듯 굴러내듯 접붙였노라

나는 내게 나를 씌워 밀치듯 흔들듯 훑어냈으나

삭아 내린 오디 빛 폐, 살라지듯 헤어지듯 널 묻어서 스러지듯 흩어지듯 찢어졌노라

바스러진 진줏빛 뼈, 삭혀지듯 후려지듯 널 묻혀서 사라지듯 흐려지듯 째어졌노라

너는 내게 너를 씌워 기대듯 감싸듯 휘어왔구나

가라앉는 무채색 빛, 소리치듯 소리 없이 날 데리고 짓누르듯 찔러내듯 끊어냈노라

너는, 나는, 우린 그러했노라.




흐르지 않는 9분간



컵라면에 물을 붓고 편의점 밖을 보니

다들 어디론가 걷고 있다

그리고 나를 보니

뱅글뱅글 돌고 있다. 제자리를

나는 방향타 잃은 배, 갈 곳 몰라 돛 접어둔 배

다른 이들 끌어주던, 표류를 끝내주던

가로등 누런 불빛은 내게만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아니하였다

컵라면을 다 먹은 난 다도해 속 섬처럼 많은

가로등 불빛이 허망이 길 비추는

도시로 표류하러 닻을 올렸다

언젠가 내게 올 보물섬 찾아



스러짐에 임하여


언젠가 나 올적에

어버이 우셨거늘

이제 와 나 갈 적에

뉘 있어 울어주리

 

애닯다 세월아

서럽다 시간아

돌아본들 돌아올 줄 모르고

후회한들 흐를 줄만 아니

돌아보면 회한이요

되새기면 눈물이나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나 이제 눈 감으면

천국도 필요 없다

지옥도 필요 없다

스러지면 그만인걸

고뇌한들 무엇하리

갈망한들 무엇하리

처음부터 아니 온 듯

조용히 사라지리

말없이 사라지리




이상향




엎치락뒤치락 

무서워해 가며 불안해해 가며

내 가슴 쳐가며 네 가슴 쳐가며

너를 밟고 또 나를 밟고 

질척이는 진창을 밟아가며

눈물 콧물 질질 흘려가며

그래도 가고 싶던, 그리도 가고 싶던

그곳은 어디 있나

내 가슴에 있나 네 가슴에 있나

아니면 어느 날 밤 

소리죽여 울던, 날 보며 울던 

울어매 가슴속에 있나




탄생



당신이 저를 불러주셨을 때 

비로소 저는 태어났습니다

당신 안 저는 살아있었습니다만

당신이 저를 지우고자 

눈물 흘리셨을 때에도

당신이 저를 지키고자 

눈물 흘리셨을 때에도

저는, 살아있었습니다만

두 손을 꼬물꼬물 휘두를 때에도

두 발을 아장아장 휘저을 때에도

어디에도 닿지 않는 몸짓이었습니다

어디로도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였습니다 

당신이 저를 불러주셨을 때

비로소 저는 태어났사오니

제 손짓이, 발짓이 당신께 닿았습니다

제 웃음이, 울음이 당신을 울렸습니다

당신이 주신 의미가 생명이 되어

그제야 제게 깃들었나니

당신이 저를 불러주셨을 때

비로소 저는 태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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