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창작콘테스트 <등대> 외 8편

by 융융이 posted Nov 1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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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

한때는 여러 척의 배가 들어와서 이 마을에 필수였던 등대가,

이제 더 이상 오지 않는 배 때문에 사용되지 않아

눈에 띄게 낡아 버렸다.


이제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도,

숨소리도 들을 수 없는 이 바다에는.

사람의 손길을, 다정한 말을, 땅으로 울려 퍼지는 발자국 소리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등대만이 남아있다.


등대의 하이얀 몸뚱어리를 탐내던 바다도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그의 몸뚱어리를 탐내지 않았고.

가끔씩 소심하게 색 바랜 등대의 몸뚱어리를

슬쩍 감쌀 뿐이었다.


, 넌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이냐.


자신의 눈물을 바다로 흘려 보내고,

소리 없이 밤마다 홀로 빛나는 채.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라는 어리석은 등대.


가끔 들리는 바람과

날갯짓 하며 날아오는 기러기 떼한테,

너의 고독을 맡기며 너는 오늘 밤도 홀로 빛난다.


사람의 손길을, 다정한 말을, 땅으로 울려 퍼지는 발자국 소리를

애타게 그리워하며.

그렇게 소리 없이 눈물 섞인 빛을 내보내는.


나의 오랜 벗 등대




잔월효성

새벽하늘에 떠 있는 달(그믐달)과 샛별(금성)


기울어진 고개에서

피어나온 웃음은

잔인하리만큼

날카롭고 싸늘하여

자신이 그믐달임을 알린다.


밤하늘 한 가운데에 자리잡아

이슬이 돋아오는 시간에도

하염없이,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자리잡아

자신이 그믐달임을 알린다.


새벽하늘로 자신을 가린 채

고요한 물결위로 올라와

어김없이 떠있는 그믐달 곁으로

샛별은 말 없이 다가와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리고는 돋아온 이슬이

시간을 타고 사라질 때즈음에


희미해져 가는,

잔인하리만큼

날카롭고 싸늘한 그믐달을 쫓아

샛별 또한 자신의 존재를 묻힌다.


고요한 물결위로도

하염없이,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자리잡고 있던 그들은

돋아온 이슬과 함께

시간을 타고서 자신들의 존재를 묻힌다.




당신의 세계

 

빨간색 리본이 출발을 알리고,

주황색 뻐꾸기가 노래하며 왼쪽으로 걸어가네.

여기는 어지러운 세계.

신호등이 노랑색 일 때 길을 건너세요.

초록색 잎 안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통로.

앨리스가 지나갔던 이상한 길.

파란색으로 보이는 바다.

그러나 그 속은 투명하지.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남색의 바다가 보일까나.

출발과 반대인 보라색 리본의 도착지.

어서 오세요, 오래 기다렸답니다.

여기는 당신의 세계.




자리


이제 더 이상,

여기에는 당신의 자리가 없다.


이 좁은 공간에,

누군가로부터 받은 아픔과.

그 아픔을 지우기 위해 발버둥 쳤던 행동들과.

그리고 미친 척하고 행복한 척 했던 내 모든 것들이.


이 좁은 공간을 채우고

또 채워서.


그래서 이제 더이상,

여기에는 당신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사계절

봄,
따뜻함이 피어오르고

여름,
열정으로 물들어간다.

가을,
모든 것이 식어가고

겨울,
죽음의 끝이 보인다.

그러나 다시 봄,
따뜻함이 피어오르고

다시 여름,
열정으로 물들어간다.



상처

그것의 이름은 상처다.
어릴 적, 친구와 뛰어놀 때
넘어져 나를 아프게 했던 것.

그것의 이름은 상처다.
친구와 싸웠을 때
친구의 눈물이 내 가슴을 찌른 것.

그것의 이름은 상처다.
첫 이별 후, 내게로 찾아온
멈출 수 없었던 그 눈물의 의미.

그것의 이름은 상처다.
지금껏 잊고 있다가
물 흐르듯 머리에 스쳐지나 갈 때

눈 시울이 붉어지는 것.



달에게

너무 밝아서 혼자인 걸까
너의 주위가 어두워서 혼자인 걸까

가까이 있는 것 같은 착각으로 인해 혼자인 걸까
정말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혼자인 걸까

네가 차가워 보여서 혼자인 걸까
아니면,

닿을 수 없어서 너를 바라만 보는
그런 내가 혼자인 걸까



밤을 사랑하였네

모든 것이 진실되게 보이는
그런 밤을
난 사랑하였네.

어떤 행동을 취하여도
아무도 보지 않는
그런 밤을
난 사랑하였네.

가짜 같은 진짜와
진짜 같은 가짜로 뒤덮여
사방이 밝아서
모든 것이 잘 보이는
그러한 낮 보다는

내가 있는 듯 없는 듯한
그런 밤을
난 사랑하였네.



나에게는 슬펐다

한순간 폈다가,
금세 져버리는 벚꽃도.
있는 힘껏 들어오다가,
슬금슬금 뒤로 빠지는 바닷물도
나에게는 슬펐다.

어느 순간 보이지 않게 된
그 이름 모를 나무도.
나무에게서 독립해
셀 수 없이 떨어지던 수많은 낙엽도.
나에게는 슬펐다.

그것들이 마치,
내게 이별을 고하는 거 같아서.

그래서 나에게는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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