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회 공모 시 부문 응모작_원형으로의 이사 외 4편

by Amy posted Dec 0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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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으로의 이사

원형을 원형으로 갉아내기 위한 이사가 한창이다

수면 아래서 천천히 닳아가던 자갈처럼
내딛는 걸음마다 이름 잊은 얼굴들이 낡아가는데
너는 어느 마루 끝에 여전히 걸터앉아
멀고 먼 궤적을 그린다

너는 문득, 시간에 공간을 새겨가는 것인지
공간에 시간을 새겨가는 것인지를 물었다
나는 그 때, 우리가 모르는 새에 지붕 위에 늘어서던
원인 모를 흠집들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남겨진 시선들로 차오른 구멍의 마지막을
남김없이 땜질해 나가는 너의 뒷모습이
강바닥을 구르던 기억처럼 점점이 둥글어진다

옮겨낼 수 없는 기억들이 벚꽃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기에,
우리는 가득하게 비워진 방 가운데서
무릎을 나란히 세우고 앉아 운다




가위의 정원

잘 꾸며진 한 쌍의 기계처럼
아귀가 맞아들었던 손들을 기억한다
창백한 꽃잎들을 마디 끝에 달고서
잦아드는 숨 새로 맞물릴 때마다
무언가는 또,
잘려나가곤 했다

어느 꼭지를 잘라내어도
봉오리는 안으로만 말려들었고
날들이 살갗 위를 기는 동안에는
자욱만이 켜켜이 번졌을 뿐이다

그래도, 피었으므로
꺾꽂이는 순조롭다 하였다

매듭은 꽃이 피듯 풀려나갔지만 나는
여전히 코끝이 욱신거렸으므로,
양손으로 기관지를 콕 틀어막았다




금붕어

밤새 삼킨 거품들로 부풀어
터지는 순간 마다 
깜빡,
기우는 몸뚱이가 낯설다
헛디뎌 본 일은 없지만
기다림과 멈춤의 신호만이 빼곡한
등허리를 세워 걷기란 어려운 일이다
모난 것들이 부딪혀 오면
깜빡,
정신을 잃어버리고 마는데
닫힌 적 없는 눈꺼풀 탓에
닿을 곳 잃은 꿈들이
종양으로 부푼 이마를 문지르며
흔적 없이 흐르다가 문득
깜빡,
잠겨드는 틈새가 바스락 거린다




소유의 오류

1. 네가 온전히 내 것이 아닌 이유
네 몸 어딘가에 바코드를 마련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때때로 너를 잃고 헤맨다
번호를 매기고 푯말을 세워 기억해야지
너의 단편을 쥐고 돌아간다
돌아서 간다

2. 내가 온전히 네 것이 아닌 이유
일 더하기 일은 이,
너는 수식 아래 웅크려 있다
뿌리는 잎을 말리기 위해 흙을 붙들어야 했다
너, 와 나, 사이로 희미해지는 메아리가 왔다
그리고 갔다
너는 내게 쥐어준 단편을 잊는다
잊지는 못할 것이다

3. 네가 온전히 네 것이 아닌 이유
너는 온 방의 거울들을 견딘다
지속과 붕괴의 시간을 잰다
폐허를 걷기엔 맨발이 좋다 하였다
밤이 차게 죽어가는 동안 너는 네게 돌아오지 못한다
무너진 담장 아래서 쉬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이해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야
너는 일어서지 않는다

4. 내가 온전히 내 것이 아닌 이유
나는 너의 침대 아래 숨어들어 흩어진 발들을 움켜쥐고 운다
부풀어가는 네 머리를 안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네게 지불하지 못한 모든 것들을 위해 평행의 언저리를 딛는다
너를 사기 위해 나를 내밀어 본다
아무도 가진 이가 없었으므로, 영수증을 받지 못했다




그녀의 계단

지금은 거미가 빼곡이 금을 그었을
이층의 잘 마른 방을 향해 오른다

창 밖엔 어느 새 황혼이 피었으므로 앞섶을 다잡았다
층층을 따라 이리저리 패인 그림자 한 움큼에
멍자욱이 꽃잎처럼 아룽졌지만
손바닥엔 검붉은 손톱자국이 웃는다
구슬 같은 얼음 밭은 항상 서걱여
맨발을 디디기엔 날카로웠다

귀퉁이에서 먼 시절의 노래를 들었다
나는 무지개를 잘라먹으며 자랐기에
무지개가 끝난 곳에서 성장통도 멈추었다
그러안은 보퉁이 안에는 여전히 
버릴 수 없는 얼굴들이 있다
다리 하나를 잘라내어도 바로 설 수 있도록
차라리 지네이면 좋으련마는

미처 잠그지 못한 단추들이
바람에 자그락 자그락 떨고 있었다



이름 이승혜

이메일 주소 illusiono_o@naver.com

HP : 010-3413-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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