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
정말로 짙은 밤이었다.
감은 눈 아래까지 밝아오는 빗소리에
한참을 뒤척이다 창문을 열었다.
생각으로 가득 찬 방 안으로
차가운 빗물이 잔잔하게 들이쳤다.
두 뺨에 닿는 빗물은 따뜻했기에
얼어버린 얼굴은 춥지 않았지만
오히려 젖어버리는 것은 마음이었다.
입술을 뻐끔거려도 언젠가 닿을 줄 알았던 그 속삭임은
하얗고 뿌연 안개에 뒤덮여 보이지 않았다.
흠뻑 젖어버린 말들이
솜처럼 무거워져 가라앉고 말았다.
바람마저 몰아쳐 빗줄기가 거세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가만히 서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을 타고
투명한 물방울이 가득 가득 쌓여왔다.
물이 차 올랐다.
어쩔 수 있나, 그렇게 뱅뱅 헤엄만 쳤다.
짙은 밤이 더 짙어지기 전에
잠에 들 수 있었으면.
-
어린 왕자
너는 내게 해가 지는 모습이 좋다고 했지.
물감처럼 번지는 노을이 너무나 예쁘다고 했지.
해가 진다는 것은 밤이 온다는 거잖아.
그렇게도 어둠을 질색하는 내가
창문 앞에 온종일 앉아 해 지기를 기다리는 이유
이쯤 되면 알 법도 한데.
이렇게 늘 네 생각이 난다면
해 지는 모습 43번도 더 볼 수 있을 것 같아.
다가올 깜깜한 밤도 좋아해볼 수 있을 것만 같아.
-
그 아이의 하늘
삶이 너무 바빠
나를 돌볼 여유같은 것 가질 여유 없었다.
뭐 그리 대단한 삶이라고
땀과 눈물 흘려가며 하루하루를 버텨왔는지,
하루하루를 견뎌왔는지.
그 어릴 적,
그네에 앉아 하늘까지 발 뻗으며
언젠가 저 구름위에 닿겠노라 다짐했던 아이는
어느샌가 한없이 한없이 추락하고 말았다.
키가 커 갈수록 너무나 낮아져버린 나의 하늘은
더 이상 그 아이의 하늘과 같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발 딛고 구름위를 걸어도
들이쉬는 공기는 생각보다 상쾌하지 않았고,
아무리 웃으려 노력해봐도
구름 아래 세상은 아름답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되었다.
너무 바쁜,
생산적이지만 행복하지 않은,
그런 어른으로.
-
공유
말하지 않아서 몰랐다.
너 또한 사람에 치이고
정에 상처받고
세상에 쫓기며
하루하루를 버텨간다는 것을.
사실은 나도 너도,
우리 모두가 아픔 속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픔에 무뎌졌다는 것을.
그래, 실은, 나 혼자 감당해온 아픔이 아니었던 것이다.
각자가 짊어진 짐의 무게는 다르겠지만
그렇게 너와 나는,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아픔에 위로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
진심
나 너에게 편지 쓰고 있어.
지금 하늘엔 달이 둥둥 떠다녀.
그 달빛 마치 너를 닮아
홀린 듯 글씨를 써 내려가.
새벽에 쓰는 편지라 그런지
보고 싶다는 말 밖에 쓸 수 가 없어.
정말 새벽이라 그런 건지,
네가 보고 싶어 새벽인 건지.
그게 어떻든 이 새벽은 영영 가지 않을 것 같아.
이 달은 영영 지지 않을 것 같아.
보고 싶다. 부디 너도 내 생각 하길.
나 처럼 쉽게 잠 못이루는
아름다운 밤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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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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