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류 속에 마법 : 느림
우리는 약속 장소를 착각하여
서로 다른 장소에서 계속 기다리죠.
무슨 일 있나 걱정하면서
그래도, 왜 이리 안 와?
선뜻 전화를 걸지 않는 건
그냥, 기다림이 좋아서였지요
좋은 사람을 기다리는 그 순간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알기에.
우린 그랬던 것 같네요
노을 속으로 혼자 날아가는 새가 외로워 보인다고 말했지요
지금은 혼자지만 가족이나 친구 만나러 가는 걸 거야
곧, 외롭지 않을 거야 말했죠
우리는 고립되었거나 어두웠던 시간으로부터 왔지요
따스한 색으로 물들어 가는 노을을 따라 걸었죠
둥지를 찾아 혼자 날아가는 저 새처럼.
가끔은, 약속 장소가 어긋난 문으로 들어가
오래도록 좋은 사람을 기다려보고 싶네요
조금만 느리게 와도 되겠지요?
밤의 정답
이토록 잠을 못 이루는 까닭은
12월의 어느 밤이
검은색을 몽땅 내다 버려서인 것을
빈속에 고여있던 술이 사라져서 그런다고
사막에서 샘을 찾듯이 편의점을 기웃거린다
하얀 종이가 정말 나무에서 태어난 게 맞는다면 왜?
싹을 틔우지 않고 접히거나 찢기거나 하는지
실은 연필도 나무에서 크거나 작아지는데
종이를 만나면 그리 심각해지는지
원래 한몸일 수 있는 일인걸
광화문에 촛불 이백만 개가 산소를 다 태워도
모두 숨 쉴 수 있는 건
염원이 숨을 불어넣고 있어서 그런 거라고
우리의 소망은 올챙이 몸을 하고 있을까?
자꾸 미끄러지는 이유를 물으니 논바닥에 유성이 있다고
빛으로 만든 코트를 입었던 시절을 잊어서 그런다고
입체적인 이별
멈춰진 시간 속으로 들어가버린 너
남아있는 내 시간은 너의 색깔을 찾고 싶다
그리움은 투명한 망토를 입고
내 시간 안으로 자꾸자꾸 들어와 별들이 쓰다만
편지를 쓴다
하얀 눈이 눈물처럼 흩날리는 건
12월에는 너의 눈물이 눈물샘에 고이지 못해서겠지
너의 기억의 나라에서 나는 자작나무가 될래
언제나 순결한 빛으로 너를 부를 수 있게
어두운 공간이 시간을 가진 게 아니라면
시간이 우리의 슬픈 마음을 지배하는 것일까?
전설 속의 푸른 검은 검투사의 손금을 기억할까?
기억하지 못한다면 검의 전설도 사라지겠지
지금도 떠오르는 건 백합이 피고 지던 너의 이마와
휘파람을 잘 불던 입술이 사랑이란 음절로 변해가던 그 모습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은 너의 것이니
너의 색깔들에게 나의 날개를 주께
이듬해 봄
유난히 제비꽃이 모여 핀 언덕에서
너의 깃털을 모두 모아 안아 줄게
그때는 우리의 이별이 태양의 문을 열고 들어가
거꾸로 감기는 태엽이 고통의 비명을 지를 때까지
너의 전부를 사랑하겠어
내시경
식도. 위 속으로 구부렸다 펴지는 소음을 목구멍으로 삼킨다
살아온 세월이 고단하여 침은 홍수가 되어 끈적일까?
의사는 모니터 속에서 나를 훤히 들여다보는데
정작 주인은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시뻘건 협곡과 상처 입은 언덕들을 구경한다
세월이 흐른다는 것은 통증이다
고이고
떠나고
잊히고
변해가고
모두 조금씩
기억 저편으로 사라질 시간을 보낸다
통증의 길에서
상처 입은 언덕에도 꽃은 피고 지고, 물들어가고
시간이 걷는 어떤 기억의 길, 병실에서
긴 호수에 매달린 작은 거울은
장밋빛 노을이 사람의 몸 속에도 있는 걸 알았다
선물
그대는 파란 불꽃보다 아름다운 이를 본 적이 있는가?
어느 아담보다 인상적인 이를 만져본 적이 있는가?
이국의 눈동자에 흐르는 고독에 입맞춤한 적 있는가?
나의 이브는 오로라 빛의 무늬로 황홀하였으니
보름달도 질투하였다네
겨울 강가에서 둥근 돌을 던졌다네
얼음의 숨구멍을 찾아서, 불안정한 심장을 찾아서
쓸쓸한 빛으로 물들어가는 나무다리를 걸었네
잡은 손 사이로 헤픈 웃음 흘러
찬바람은 뜨거워질 준비를 하고 있었네
러시아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목적지 잊은 여행을 하기로 했다네
창밖 설원에는 하얀 자작나무들 선물이라고 속삭이겠지
그대는 사랑이 올 때 이름이 없다는 걸 아는가?
지루한 자물쇠나 용기 없는 열쇠 따위를 버려
슬픈 천국과 행복한 지옥으로부터의 송신은 이미 끊겼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