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차 창작 콘테스트 (권태로운 발걸음이 멈춘 기억 외 4편)

by 朴本妃 posted Feb 02, 201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권태로운 발걸음이 멈춘 곳의 기억

 

 

 

쇠고랑이 마저 풀리지 않아 질질 끌리는 무거운 발을 이고 집으로 향하던 날이었다.

골목을 돌아 보이는 퀴퀴한 비 냄새가 섞인 포차에 이끌리듯 들어서서

괜히 뜨겁기만 한 주머니에 꼬깃꼬깃해진 천원 몇 장과 동전들을 우수수 꺼내놓고

침을 연거푸 삼키다 결국 서비스로 주는 어묵국물과 함께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주황 불빛 아래 낙서들은 내 안주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내 건너편에 새하얗게 눈이 가득 쌓여 흐리멍덩해진 아저씨의 눈은 내 가슴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턱을 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켜켜이 밤에 가득 쌓인 바람,

지나가는 여러 색의 목소리들,

아주머니의 푸짐한 국자의 인심과 함께 모락모락 피어나 흩어지는 연기의 꽃들이여.

 

 

, 그것이었구나. 내 바람들은.

그저 지나가는 것들에도 아름다움을 느끼기엔 지금도 충분한 나였다.

 

 

괜한 걱정이 뇌()게 머물러있었구나.

소주 한 잔에 쇠고랑이 툭 하고 풀려났다.

여느 날과 같지 않던 어느 날의 기억.

 





붉은 마네킹

 

 

 

새하얗고 아름다운 나는 누구도 해하지 않았으나 그 위로 자꾸 바늘이 꽂힌다.

뻣뻣한 몸은 어설프게 자꾸 바늘을 밀어내어 나를 지키고자 한다.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무자비하게 다시 내리꽂는 너의 존재는

또 다른 실수와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한 되새김이었으리라.

 

나를 안고 아무 향도 없이 흩어지는 눈물로 좌절하던 너를 묵묵히 나는 응원하였다.

무뎌진 내 몸과 어느 살갗에 맞물려 스물 스물 적셔지는 새빨간 몸은

어느새 화려한 붉은 드레스를 입는다.


쭈뼛쭈뼛 할 일을 마친 색 바랜 나를 누군가에겐 어른이라 불리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이크, 오늘도 늦었다

헐레벌떡 알몸으로 출근

 

 

가는 길에 상점을 들려 옷을 사고

신발을 사고, 지갑을 사고

 

 

가는 길에 미용실에 들려 예쁘게 단장하고

잠깐만 쉬어야지

 

 

시간을 쫓다가 오늘도 잃어버렸다

달리기 경주도 여기까지

 

 

이크, 오늘도 늦었다

헐레벌떡 만신창이로 퇴근.






하나하면 너와 나

(To Love , From Love)

 

 

 

 

사랑이란 단어는 어색하고도 설레며

가끔은 내 옷장 속 T-셔츠처럼 loose 하면서도 tight 하며

샤넬Bag이나 루이뷔통Bag 중 선택하라는 진부한 사치스러움 속

밥숟가락에 김치 한 점 올려주는 일상을 담는다.

어떤 이유였건 사랑은 가슴을 움켜쥐게 만드는 모순된 아름다움이라 감히 말한다.

 

 

엎치락뒤치락 무기 없는 전쟁을 이제 막 끝낸 너와 나

언제 식었는지 모를 커피를 다시 끓이고 잔을 부딪치며 취하려 한다.

식은 커피의 맛은 더 쓰고 밋밋할지 몰라도 달달한 설탕 한 스푼에 너와 하나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설레는 마음으로 되감기 버튼을 누른 후 음악의 짜릿한 전율처럼 너와 나의 아름다움을 재생한다.

   



그래, 하나하면 너와 나

바다는 흐린 날에도, 맑은 날에도 마음을 전해주는 세상에서 가장 발 빠른 사랑의

우체부 일거야.

매일같이 바다에게 편지를 쓰고파. ‘사랑해라고

그 변치 않는 맘 잊지 않고 하나가 될 것을 약속해.

 

 

 

하나의 약속은 너와 나의 가장 달콤한 숙제로 남고,

아무도 모를 뜨거운 감성의 라디오에서 흘겨 쓴 어눌한 손재주는 언젠가 마음으로 전해지겠지.

 

 

그렇게 하나가 된 아름다움을 나는 흘러가듯

영원히 미완성인 채로 오늘도 재생시킬 거라고.

 

 

하나하면 너와 나

Forever.






청춘




가끔 턱을 괴고 멍하니 텅 빈 화면을 바라보고 그려본다.

그럴 때면 영화의 한 필름처럼 빠르고 복잡하게 머리를 스쳐가는 나를 본다.

 

나만의 영화에 푹 빠져있을 때 쯤

누구도 모르게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다.

 

정지된 화면 그 속에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반복적으로 중얼거렸다.

" , 힘들다. 오늘같이 지치고 힘든 날은 다신 없을 거야."

 

중얼거림 속 삐죽 나온 입과 지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꼬리가 올라간 입은

무한대의 기호처럼 서로 맞물려 빠르게 흐려져 갔다.

 

 

그리곤 다시 투명한 화면으로 돌아올 때 쯤

지금의 나에게 중얼 거린다.

 

      

훗날 영화 필름을 다시 재생시켰을 때

또 다른 일시정지 버튼을 누를 때가

나의 멈추지 않을 또는, 잊고 있던 내 청춘이 아니겠느냐고.






박본비 (010.7404.1217)


Who's 朴本妃

profile

우리의 차가운 현재를 따뜻한 단어로 녹여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아름다워질 것이라 믿기에,

오늘도 나는 잊혀져버린 녹슨 단어를 예쁘게 닦아 조각하는 일을 한다.


Articles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