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로운 발걸음이 멈춘 곳의 기억
쇠고랑이 마저 풀리지 않아 질질 끌리는 무거운 발을 이고 집으로 향하던 날이었다.
골목을 돌아 보이는 퀴퀴한 비 냄새가 섞인 포차에 이끌리듯 들어서서
괜히 뜨겁기만 한 주머니에 꼬깃꼬깃해진 천원 몇 장과 동전들을 우수수 꺼내놓고
침을 연거푸 삼키다 결국 서비스로 주는 어묵국물과 함께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주황 불빛 아래 낙서들은 내 안주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내 건너편에 새하얗게 눈이 가득 쌓여 흐리멍덩해진 아저씨의 눈은 내 가슴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턱을 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켜켜이 밤에 가득 쌓인 바람,
지나가는 여러 색의 목소리들,
아주머니의 푸짐한 국자의 인심과 함께 모락모락 피어나 흩어지는 연기의 꽃들이여.
아, 그것이었구나. 내 바람들은.
그저 지나가는 것들에도 아름다움을 느끼기엔 지금도 충분한 나였다.
괜한 걱정이 뇌(腦)게 머물러있었구나.
소주 한 잔에 쇠고랑이 툭 하고 풀려났다.
여느 날과 같지 않던 어느 날의 기억.
붉은 마네킹
새하얗고 아름다운 나는 누구도 해하지 않았으나 그 위로 자꾸 바늘이 꽂힌다.
뻣뻣한 몸은 어설프게 자꾸 바늘을 밀어내어 나를 지키고자 한다.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무자비하게 다시 내리꽂는 너의 존재는
또 다른 실수와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한 되새김이었으리라.
나를 안고 아무 향도 없이 흩어지는 눈물로 좌절하던 너를 묵묵히 나는 응원하였다.
무뎌진 내 몸과 어느 살갗에 맞물려 스물 스물 적셔지는 새빨간 몸은
어느새 화려한 붉은 드레스를 입는다.
쭈뼛쭈뼛 할 일을 마친 색 바랜 나를 누군가에겐 어른이라 불리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이크, 오늘도 늦었다
헐레벌떡 알몸으로 출근
가는 길에 상점을 들려 옷을 사고
신발을 사고, 지갑을 사고
가는 길에 미용실에 들려 예쁘게 단장하고
잠깐만 쉬어야지 …
시간을 쫓다가 오늘도 잃어버렸다
달리기 경주도 여기까지
이크, 오늘도 늦었다
헐레벌떡 만신창이로 퇴근.
하나하면 너와 나
(To Love , From Love)
사랑이란 단어는 어색하고도 설레며
가끔은 내 옷장 속 T-셔츠처럼 loose 하면서도 tight 하며
샤넬Bag이나 루이뷔통Bag 중 선택하라는 진부한 사치스러움 속
밥숟가락에 김치 한 점 올려주는 일상을 담는다.
어떤 이유였건 사랑은 가슴을 움켜쥐게 만드는 모순된 아름다움이라 감히 말한다.
엎치락뒤치락 무기 없는 전쟁을 이제 막 끝낸 너와 나
언제 식었는지 모를 커피를 다시 끓이고 잔을 부딪치며 취하려 한다.
식은 커피의 맛은 더 쓰고 밋밋할지 몰라도 달달한 설탕 한 스푼에 너와 하나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설레는 마음으로 되감기 버튼을 누른 후 음악의 짜릿한 전율처럼 너와 나의 아름다움을 재생한다.
그래, 하나하면 너와 나
바다는 흐린 날에도, 맑은 날에도 마음을 전해주는 세상에서 가장 발 빠른 사랑의
우체부 일거야.
매일같이 바다에게 편지를 쓰고파. ‘사랑해’ 라고
그 변치 않는 맘 잊지 않고 하나가 될 것을 약속해.
하나의 약속은 너와 나의 가장 달콤한 숙제로 남고,
아무도 모를 뜨거운 감성의 라디오에서 흘겨 쓴 어눌한 손재주는 언젠가 마음으로 전해지겠지.
그렇게 하나가 된 아름다움을 나는 흘러가듯
영원히 미완성인 채로 오늘도 재생시킬 거라고.
하나하면 너와 나
Forever.
청춘
가끔 턱을 괴고 멍하니 텅 빈 화면을 바라보고 그려본다.
그럴 때면 영화의 한 필름처럼 빠르고 복잡하게 머리를 스쳐가는 나를 본다.
나만의 영화에 푹 빠져있을 때 쯤
누구도 모르게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다.
정지된 화면 그 속에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반복적으로 중얼거렸다.
" 아, 힘들다. 오늘같이 지치고 힘든 날은 다신 없을 거야."
중얼거림 속 삐죽 나온 입과 지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꼬리가 올라간 입은
무한대의 기호처럼 서로 맞물려 빠르게 흐려져 갔다.
그리곤 다시 투명한 화면으로 돌아올 때 쯤
지금의 나에게 중얼 거린다.
훗날 영화 필름을 다시 재생시켰을 때
또 다른 일시정지 버튼을 누를 때가
나의 멈추지 않을 또는, 잊고 있던 내 청춘이 아니겠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