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차 창작콘테스트 시 공모 | 낮달 외 4편

by 김아일랜드 posted Feb 0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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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달


낮달의 반투명한 비애로 연보랏빛 석양이 저문다


석양이 완연 보라일 수 없는 까닭은 

스르륵 어깨의 힘이 풀린 낮달이 

한 나절 오후의 연 適을 헤매던 데에 있다


생채기를 입어 해진 달 선혈을 석양에 튀지도 못해

그만, 가녀린 연분홍 눈물을 떨고야 만다


이내 낮달의 귀밑은 붉어지고 곧 저녁이 오겠다



/


모우



비를 만나기까지 그리움에겐 끝이 없었다

오랫동안 그치지 않을 기세로 

여름날 싱그러움도 잊은 커져만 갔다


그리움이 숲을 이루어 무성하게 여름은 살아 있었다 

여름이 내뱉는 숨은 거대했고 숨결마다 당신이 맺혀서

나는 말라갔다, 당신이 숲이 되어가는 동안 나는 가물어갔다


지난날의 결정들엔 비죽한 모가 나있어

하루 종일 그리운 이름들을 둥글게 쓸어 봐도 

여름을 지내는 동안 나는 자꾸만 찔리고야 말았다 


힘겨운 하루를 견디고 공허한 아지랑이만 피어내다가

울컥 쏟아지는, 여름 저녁 비를 만났다

우라고 했던가 


당신은 내게 한철 소나기여서 터에 꽃을 피우고 지나갔다

비의 여운이 길어 모우에 다다를 때까지 당신을 그리워했다


느닷없는 비에 나는 우산 하나 갖지 못했다

손을 오므려 모우를 모아 빗물을 응시한다

우산 없이 모우를 맞기로 한다

비에 젖는 동안 나는 당신을 잊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비가 내려주어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다



/



집으로 오는




집으로 오는 내내 흐린 하늘은 비를 쏟았다

나는 못내 비가 반가워 나의 생활을 조금 꺼내어 놓았다

상해버린 마음에 단비를 맞히듯 나는 그것이 축축하게 젖어가기를 바랐다

햇빛에 널어놓으면 솜털까지 하얗게 마를까봐서

옷가지를 입어도 나는 부패한 냄새가 날까봐서 

부러 가두어 놓은 나의 부끄러움의 조각이었다


부끄러움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나무 기둥에 묶인 파란 자전거를 본다

역시 주인을 잃고 나무 아래서 비를 맞고 있다

귀가 나무에 묶여 꼼짝없는 그를 보며 지금의 나와 같다고 생각한다


외출해 놓은 나의 생활과 닮아서 그의 손에 가여움을 쥐여준다

어딘가 삶의 어깨 쪽이 망가져 있다는 생각

내가 나의 삶에서 조금은 덜어져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는 이제 아무리 페달을 되감아도 옛일에 다다를 없을 것이다

그의 전조등은 전방을 깜빡이다가 그렇게 침잠해 갔을 것이다


시간이 나의 걸음과 조금 느리게 흐를 알게 되었다

그날들에 나는 매일 외로움을 이불처럼 덮고 잤다는 것과

숨을 들이쉴 때마다 외로운 공기와 마주했다는 것을


집으로 돌아온 이유도 없이 열심히 허공에 페달을 돌려보았다



/


연필깎기




연필을 깎을 때면 마주하는 내 안의 헝클어진 풍경


연필의 끝은 조금 삐뚤한 각도로 빚어지는 게 좋아

육각형을 이루는 연필의 모서리를 균일하게 깎아내지 않는 것이 

연필의 모양을 더 매력적으로 만들지


연필을 깎을 때면 나는 조금 못나도 좋아

떨어져 나간 연필의 시간보다도 나는 두둑해졌으니까



/




오후 세시




나의 오후는 군중 속에서 고독하다

무정하게도 나는 이 고독이 용서되지 않는다


기약 없는 차 한 잔들로 점철되었던 나의 오후 세시


언젠가 그 시각에,

생과 미뤄두었던 차 한 잔 나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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